항목 ID | GC082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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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希孟 |
이칭/별칭 | 경순(景醇),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문량(文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선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있었던 효사정에 관한 기문을 쓴 조선 전기 문신.
[개설]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쓴 「효사정기」로 인해 조선 초기에 세워진 효사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효사정은 노한의 별장으로, 노한이 어머니를 장례지낸 후 여묘살이를 하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세워졌다. 노한은 이후 이곳에 본인의 묘를 쓰도록 할 정도로 마음을 두었던 곳이다. 노한은 동서간이던 강석덕에게 정자의 이름을 지어줄 것과 기문을 부탁하였다. 강희맹의 아버지인 강석덕은 ‘효사정’이라는 명칭은 지었지만 기문은 짓지 않았다. 강석덕이 미처 짓지 못한 효사정의 기문은 30년이 지난 후에 아들인 강희맹이 지어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기문을 요청한 사람은 노한의 손자 노사신으로, 강희맹과는 외사촌형제가 된다. 기문에는 효사정이 세워진 사정과 함께 효사정의 형승이 담겨있다.
강희맹은 세종 때 관직을 시작하여 세조와 성종 때에 활약한 문관이면서 뛰어난 문장가이다. 할아버지인 강회백으로부터 아버지 강석덕을 거쳐 본인 형제까지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다. 특히 강희맹의 어머니가 세종의 비 소헌왕후 동생이다. 이십대에 장원급제를 하여 관직생황을 시작한 이후 세조 때 세자를 가르쳤고, 『세조실록』·『예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높은 관력과 함께 문인으로도 칭송되었고, 당시 농요를 모아 정리하였다.
[가계]
강희맹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이다.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이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로,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동생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 강희안(姜希顔)이다.
[활동 사항]
18세되던 1441년(세종 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47년에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450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전임된후, 돈녕판관(敦寧判官), 예조정랑(禮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거쳐 동첨지돈녕부사(同僉知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1456년(세조 2) 동첨지돈녕부사(同僉知敦寧府事)로 승진한 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예조참의(禮曹參議)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랐다. 이후에도 예조참판(禮曹參判)·세자빈객(世子賓客), 예조판서(禮曹判書)에 뽑혔다. 1473년에 병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돈녕부사, 우찬성을 지냈다. 1482년에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학문과 저술]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서를 좋아하였다고 평가된다. 세조가 1466년에 설치한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3등과 2등의 성적으로 각각 합격하였다. 발영시에는 재상이 참여하고, 등준시에는 종친이 시험에 응하였다. 당시 세조는 강희맹을 한계희(韓繼禧)와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최고의 신하 셋으로 칭하면서, 강희맹은 명석함이 제일이라고 치하하였다. 강희맹이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며 문장이 우아하고 정밀하여 동년배들 중 강희맹을 앞서는 자가 없었다고 당시 사관은 평가하였다. 강희맹의 글은 성종 때 왕명으로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하여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금양잡록(衿陽雜錄)』·『촌담해이(村談解頤)』 등도 전한다.
[묘소]
강희맹의 묘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로 59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