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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토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73
한자 衿川土姓
영어공식명칭 Geumcheon to-seong|Indigenous clans of Geumcheo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우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지 금주(衿州) - 서울특별시 동작구·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 및 경기도 광명시 일대
성씨 시조 강여청(姜餘淸)|장보(莊甫)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를 포함한 옛 금천 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여섯 토착 성씨.

[개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전기 경기도 금천현(衿川縣)의 토착 성씨로 이(李)·조(趙)·강(姜)·장(莊)·피(皮)·계(桂)의 6성이 있었다. 금천의 토착 성씨 중 가장 대표적인 성씨는 금천 강씨로 강감찬(姜邯贊)의 5대조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하면서 진주 강씨에서 분기하였다. 2000년대 이후 서울특별시 동작구에는 금천 강씨와 금천 장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금천을 관향으로 하는 나머지 네 성씨는 현재 계승이 끊긴 것으로 추정된다.

[연원]

1454년(단종 2)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1765년 완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 및 경기도 광명시 일대인 금천현(衿川縣)의 토착 성씨[土姓]로 이(李)·조(趙)·강(姜)·장(莊)·피(皮)·계(桂)의 여섯 성씨와 이미 사라진 성씨[亡姓]로 윤(尹)·추(秋)의 두 성씨를 명기하고 있다. 금천 토성(土姓) 여섯 중 금천 이씨, 금천 피씨, 금천 계씨는 현재 연원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금천의 가장 대표적인 성씨는 금천 강씨로 시조 강여청이 신라 말 시흥군(始興郡), 즉 금주(衿州)로 이주하여 호족으로 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강여청은 원래 진주 강씨(晋州姜氏)였으나 강여청의 4세손인 강궁진(姜弓珍)이 고려의 개국 공신에 녹훈되고 5세손 강감찬이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오르면서 금천 강씨의 시조로 추존되었다. 금천 강씨는 원래 진주 강씨에서 분기하였기에 강감찬의 시호를 따라 ‘진주 강씨 인헌공파(仁憲公派)’로 분류되기도 한다. 금천 강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시대 거란의 10만 대군을 상대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이끈 강감찬과 조선 인조 대 우의정까지 지낸 강석기(姜碩期) 및 강석기의 딸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인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가 있다.

또 다른 토착 성씨인 금천 장씨(衿川莊氏)는 시조가 고려 명종 대 무신으로 거제현감(巨濟縣監)을 지낸 장보(莊甫)로 거슬러 올라가며, 금천과 더 관련있는 인물로는 조선 세종 대 문신인 장숙(莊俶, 莊淑)이 있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과 『갑오식년사마방목(甲午式年司馬榜目)』에 따르면 장숙은 원래 금천의 향리로 활약하다가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直講)과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한편 1737년(영조 13) 출생하여 37세에 무과에 급제한 장인대(莊麟大) 역시 금천이 본관으로 확인된다.

금천 조씨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717년(숙종 43)생으로 금천이 본관인 조두인(趙斗寅)이 1754년(영조 30)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확인된다.

[입향 경위]

금천 강씨의 시조인 강여청은 원래 진주 강씨이므로, 진주 강씨의 관점에서 강여청은 금천 입향조(入鄕祖)가 되기도 한다. 『고려사(高麗史)』「강감찬전(姜邯贊傳)」에 따르면 강감찬의 5대조 강여청이 경주에서 금주(衿州)로 처음 이주하였으며 강감찬의 아버지인 강궁진 대에는 이미 금주의 호족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금천 강씨는 소현세자의 빈인 민회빈 강씨가 인조(仁祖)에 의해 사사되고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였으며 강감찬의 묘마저 충청북도 청주(淸州)로 이장된 것을 감안할 때 상당수가 금천을 떠나 타지역으로 흩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다섯 성씨의 입향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황]

성씨의 본관별 조사가 마지막으로 시행된 2000년의 인구총조사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에는 금천 강씨가 8가구 26명, 금천 장씨가 2가구 6명 거주하고 있었다. 1754년(영조 30) 진사시 합격자 명단에 확인되는 금천 조씨를 비롯하여, 이씨, 계씨, 피씨는 현재 금천[또는 지명의 변천에 따라 금주, 시흥, 과천]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계열이 끊기거나 다른 본관에 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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