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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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學月報 |
영어공식명칭 | A Biblical and Church Monthly |
이칭/별칭 | 신학세계,신학과 세계 |
분야 | 종교/기독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원재연 |
창간 시기/일시 | 1900년 12월 - 『신학월보』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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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900년 12월~1904년 - 『신학월보』 월간 간행 |
폐간|종간 시기/일시 | 1905~1906년 - 『신학월보』 간행 중단 |
복간 시기/일시 | 1907년 7월 - 『신학월보』 복간. 격월간 간행 |
폐간|종간 시기/일시 | 1910년 가을 - 『신학월보』 폐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6년 - 폐간된 『신학월보』의 내용 흡수, 1916년 존스 목사가 『신학세계』를 창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0년 - 『신학세계』 폐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2년 10월 - 『신학세계』 속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0년 - 『신학세계』를 『신학과 세계』로 개칭 |
소장처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 |
성격 | 최초의 한글 월간 신학잡지 |
관련 인물 | 존스 목사|최병헌(崔炳憲) 목사 |
창간인 | 존스 |
발행인 | 존스 |
판형 | 22.4㎝×14.7㎝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900년 12월 존스 목사가 한글로 발행한 최초의 월간 신학잡지.
[개설]
『신학월보』는 1900년 12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존스(G.H.Jones)[조원시(趙元時), 1867~1919] 목사가 제물포 우각현[현재의 인천광역시 도원역 부근]에 그 발행소를 두고 국판 50쪽, 국문 4호 활자로 세로 쓰기 편집을 한 월간 기독교 잡지였다.
『신학월보』는 1889년 감리교회가 발행한 최초의 반월간 기독교 잡지 『교회』를 이어 감리교회 잡지로는 두번째로 간행한 종합적 교회 소식지 겸 신학이론과 기독교 교리를 게재한 신학잡지였다. 1900년 12월 간행되면서 곧바로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의 도움으로 대한제국 내부(內部)의 승인을 받았으며 1904년까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다. 1905년부터 1906년 2년 간의 휴간을 거친 후 1907년 7월부터 복간되어 1910년 가을까지 약 3년간 격월간 잡지로 발행했다.
『신학월보』는 창간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교회 내의 다양한 소식과 주요 지도자들의 동정을 전하고 주일학교 교재로도 사용할 정도의 기독교 교리와 역사신학, 윤리신학, 조직신학 등 다양한 기독교 신학과 관련된 논문들을 수록하였다. 이로써 한국 기독교 초기 형성과정에서 기독교 이론의 토착화에도 일정하게 공헌할 수 있었고, 목사후보생들과 평신도 교회 봉사자들이 기독교 교리지식과 신학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데 충실히 기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울, 인천, 평양, 수원 등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교회 내 인재양성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한글 4호 활자로 세로쓰기의 형태를 취했으며, 문장 단위의 한글 띄워쓰기를 최초로 시도한 것도 업적으로 평가된다. 1910년 『신학월보』 폐간 후 감리교회는 1915년 장로교회와 합동으로 『기독신보』를 간행할 때까지 『그리스도회보』를 격주간으로 발행하면서 『신학월보』가 수행했던 감리교회 내 종합소식지 겸 신학이론의 투고처로서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창간 경위]
한국 기독교 선교의 선구자인 미국 감리교회의 신문 잡지 발행사의 측면에서 1889년 한달에 2번 간행하는 반월보인 『교회』의 간행이 감리교는 물론이고 한국 개신교회가 간행하는 모든 잡지의 시초가 되었다. 이 잡지를 바탕으로 1897년 2월 아펜젤라 목사의 『죠션크리스도인회보』라는 최초의 근대적 사설 주간신문이 발행되었고, 이어서 1900년 12월 최초의 월간 신학잡지 『신학월보』가 존스 목사에 의해 간행되었다. 따라서 『신학월보』는 감리교회가 한국에서 발행한 두 번째 신학잡지가 된다.
월간으로 간행되는 신학잡지가 전무하던 상황에서 존스 목사는 『신학월보』 창간사에서, “우리 대한에서 그리스도 월보법이 없었더니, 이제는 우리가 이 일로 선봉이 되니 두렵고 삼가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여, 이 분야 개척자로서의 조심스런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다. 계속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론화하고 성경의 도리, 교회의 역사기록, 대한 교회의 진보, 하느님께서 교인에게 부여한 사명을 힘써 행함, 덕행을 행하며 이전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함 등의 갖가지 일을 기록할 것이니, 이 간행에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 교회 목사들과 선생들이 도와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러한 창간사는 『신학월보』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선교사와 교인들의 사역활동과 신앙생활의 경험들을 널리 알려서 봉사자 양성을 비롯한 교회활동 전반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간행의 취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목회자나 전도인 등 교회 내 봉사자를 양성한다는 측면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기 10개월 전에 인천에서 열렸던 감리교회의 신학강습회가 『신학월보』를 창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1900년 1월 23일부터 2월 3일까지 12일간 개최된 ‘제물포 단기 신학강습회’에서 조원시 선교사를 비롯하여 서원보, 노보을,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가 분담했던 강의과목인 역사신학, 교리와 장정, 심리학, 조직신학, 설교학, 신학개론 등의 내용을 강의 후에도 신학생들이 계속해서 연구하고 토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신학월보』라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신학이론을 전개할 신학잡지가 발행되었던 것이다.
[형태]
『신학월보』는 22.4㎝×14.7㎝의 크기로 국판 50쪽, 한글 4호 활자로 세로쓰기의 형태를 갖추었다. 오늘날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최신식의 표기법에 속하는 절 또는 문장 단위로 띄워쓰기를 한 것이 주목된다.
[구성/내용]
창간호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사설」, 「교회진보」, 「교보」, 「교육」 등 4개의 큰 항목으로 분류된다.
「사설」은 교회 내외의 소식을 전하는 난이었다. 『신학월보』를 창간하게 된 존스 선교사의 취지를 밝히고 있는 ‘월보를 설시함’을 비롯하여 ‘추수 때 기쁨’, ‘신명역행(神命力行)’, ‘아세아 동방감독’, ‘주일지킴’, ‘부인 의학사 환국함’, ‘새목사 모리시씨’, ‘내부인허’ 등의 세부 제목 하에 다양한 교회 내외의 소식을 전했다. 이중에서 ‘내부 인허’는 존스 목사가 창간한 『신학월보』를 한국인 최병헌 목사의 도움으로 대한제국 내부(內部)의 발행허가를 취득했음을 밝힌 것이다. 「교회진보(敎會進步)」는 기독교 각 분야의 교리나 신학 논문들을 게재하는 난이었다. ‘연환회 덕행규칙’, ‘예수탄일 경축론’, ‘예수 육신을 나신 뜻’, ‘천사의 찬송이라’, ‘탄일 경축 예식’, ‘문감독의 편지’ 등 세부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교보(敎報)」는 교회의 소식이라는 뜻으로 선교사와 한국인 교회 봉사자들의 동정을 게재한 란으로서, 『신학월보』의 발행소가 위치했던 인천을 비롯하여 수원, 평양 등 국내와 일본, 유럽 각지를 망라하는 해외로 왕래하면서 활동하던 감리교회 내 선교사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중요한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하였다. ‘장로 사시란돈씨 수원시찰 소식’, ‘아펜젤라 목사 일본 경유 구라파 향발 소식’, ‘시목사 대부인 소식’, ‘평양 교회 소식’, ‘김창식 전도인 소식’, ‘한창심 속장 소식’ 등으로 구성되었다.
「교육」에는 만국통일 주일공과를 실었는데, 1888년 이화학당에서 생도 12명을 모아놓고 시작된 한국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이 시작된 이후, 약 12년 후인 1900년 당시 주일학교 교육 내용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1900년부터 약 10년간 간행된 『신학월보』에 실린 내용들 중에서 특징적인 것들로는 첫째, 민족주의 학교로 이름이 있었던 상동청년학원의 설립, 둘째, 이승만을 비롯하여 구연영, 박용만, 정순만, 전덕기 등 당대 유명했던 감리교 신자들의 논설, 셋째, 교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 윤리로서 부부도, 결혼지침, 절주론 등의 생활교리, 넷째, 초기 감리교회의 의회제도와 속장, 권사 등에 대한 기사, 다섯째, 전도사들이 공부해야 하는 과정 등에 대한 것들이다.
[변천과 현황]
『신학월보』는 1900년 12월 창간되어 1904년까지 월간으로 발행되었다. 그러다가 1905년부터 1906년까지 2년동안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907년 7월 복간된 이후에는 격월간으로 1910년 가을까지 발행되었다. 창간호에는 없었던 문학작품을 게재하는 「문원」란이 제3호부터 마련되어, 독자 또는 한국인 지도자나 선교사들의 다양한 문학작품이 게재되어, 구한말 한국의 초창기 현대시와 현대소설의 형성과정에 일정한 공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 가을 『신학월보』를 폐간한 감리교회는 1911년부터 격주간의 『그리스도인 회보』를 간행하여 『신학월보』 때와 유사한 기사들을 게재했다. 주요 항목으로 「사설」, 「성경연구」, 「교육」, 「실업」, 「통신」, 「축사」, 「기타」 등이 있었으며, 「축사」 항목 외의 기사 전문은 한글 5호 글자크기로 띄워쓰기와 행의 간격 등을 이전보다 세련되게 편집하였다. 『그리스도인 회보』는 1915년 장로교와 연합으로 『기독신보』를 간행할 때까지 감리교회의 각종 소식과 동정 및 교육, 신학 등을 망라하여 게재한 종합적 기관지 역할을 수행했다.
[의의와 평가]
『신학월보』는 개항 이후 한국에 진출한 개신교가 1889년 최초로 발간한 한글 기독교 잡지였던 반월간인 『교회』에 이어, 1900년 12월 두번째로 한국에서 발행한 기독교 신학잡지였다. 다양한 교회소식과 함께 기독교 신학 각 분야의 체계적 이론을 전개한 공론장이었으므로 초기 기독교 이론의 토착화에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제3호부터 신설된 「문원」란을 통하여 시, 소설 등 한국 현대의 초창기 기독교 문학작품들이 게재됨으로써 한국 기독교 문학의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특별히 발행인 겸 편집인을 겸했던 존스 목사가 활동하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철도인 경인선의 시발점인 제물포 우각현에 그 발행소를 두었다. 이 점에서 한국 개신교의 지방 전교에도 기여할 수 있었으며, 서울은 물론이고 인천, 수원, 평양 등지로 활동 무대를 넓혀가던 구한말 감리교회의 목사 후보생과 평신도 봉사자 등 지역 인재의 양성에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근대적 출판 문화 발전사의 측면에서 볼 때 『신학월보』는 1896년 『대조선독립협회회보』에 이어서 한국 잡지 발간의 개척적 선구가 되어 일반 사회에서 『태극학보』, 『대한자강회월보』, 『조양보』, 『소년한반도』 등의 출간을 자극했고, 교회 내에서는 『엡윗청년』, 『성경강론월보』, 『가정잡지』 등의 출판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