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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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聞 |
영어공식명칭 | The Christian News |
이칭/별칭 | 『예수교신보』,『그리스도인회보』,『기독신보』 |
분야 | 종교/기독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원재연 |
창간 시기/일시 | 1897년 4월 1일 - 『그리스도신문』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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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간|종간 시기/일시 | 1907년 12월 13일 - 『그리스도 신문』이 『예수교 신보』로 개칭되고 격주간으로 발행 |
폐간|종간 시기/일시 | 1910년 2월 21일 - 『예수교 신보』 폐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2월 28일~1914년 8월 - 장로교 총회에서 주간지 『예수교 회보』 발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5년 12월 7일~1937년 - 감리교의 『그리스도 회보』와 통합한 제2차 장감연합 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여 1937년까지 22년간 교파연합 신문으로 지속함 |
소장처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 |
성격 |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파연합 신문 |
관련 인물 | 언더우드|아펜젤러|게일 |
창간인 | 언더우드 |
발행인 | 언더우드|게일 |
판형 | 초기 31.0㎝×22.8㎝|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것 중에 1905년 7월 1일 장감연합 신문으로 재출발 후 간행된 10권8호[1906년 2월 22일]는 22.1㎝×14.7㎝, 半葉 19행 32자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897년부터 선교사 언더우드가 발행한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파연합 신문.
[개설]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 양대 교단이 1897년 2월에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발행한 『죠션크리스도인 회보』와 언더우드(Underwood, H.G.)가 4월 발행한 『그리스도신문』이 각각 등장하면서 한국인의 개화 계몽과 기독교 선교를 위한 근대적 사립신문의 시작을 알렸다. 언더우드가 창간하여 편집과 저술의 거의 대부분을 담당한 『그리스도신문』은 초기부터 8~12면으로 내용과 분량이 풍부한데 비해 아펜젤러가 1897년 12월 『죠션크리스도인 회보』를 『대한크리스도인 회보』로 개칭한 후, 1900년 9월 귀국하면서 생긴 공백을 메꾸지 못하고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에 따라 1905년 1월 남북감리교가 함께 새로 시작한 『그리스도인회보』를 『그리스도신문』이 1905년 7월 1일자로 통합하여, 신문의 제호와 발행호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신문』은 초기에는 대체로 국배판 크기로 8~12면으로 발행하였으며 3단의 순한글 세로쓰기 형태였다. 창간 취지를 조선의 자주 독립을 후원하고 조선 백성의 개화 계몽을 도와준다는 것을 내세웠으며, 기독교 선교의 성격을 띤 교회 관련 소식이나 교리 외에도, 농업과 공업 등 서구의 근대산업과 과학기술, 서구문명의 대강에 대해 소개하는 란이 많았다. 1905년 7월 1일자로 개신교 연합신문으로 출발한 『그리스도신문』의 편집주간은 게일(J.S.Gale)이었고, 케이블(E.M.Cable), 무스(J.R.Moose), 무어(S.F.Moore) 등의 선교사가 편집을 도왔다. 재정은 빈톤(C.C.Vinton)이 맡았다.
1907년 12월부터 제호를 『예수교신보』로 변경한 후에는 기존의 내용에서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의 내용을 공부하는 난을 많이 할애하여 영혼구원에 중점을 두었다. 1910년 2월 21일 장감합동으로 신문 발행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발생하여 폐간되었으나, 1915년 제2차 장감합동 신문인 『기독신보』가 발행되어 1937년까지 22년간 지속되어 일제 강점기 한국 개신교의 교파연합 신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창간 경위]
『그리스도신문』은 1897년 4월 1일자 창간호에서 조선의 자주 독립과 조선 백성의 부강함을 목표로 내세웠다. 동시에 대군주 폐하에게 충성을 다하며 백성을 도와 참되고 옳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려고 한다는 창간의 취지를 밝혔다. 창간 당시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시작한 것이었으나, 1903년부터 1904년경에 이르러 장로교 총회에서 장로교회의 신문임을 공식화했다. 초창기 편집과 저술의 대부분은 언더우드가 직접 담당하고 주관했으며, 사무적인 일은 빈톤이 맡았다. 또 농업과 공업에 관한 기사는 미국 공사 실(J.M.B.Sill), 부공사 알렌(H.Allen)을 비롯하여 허치슨(Hutchson), 벙커(D.H.Bunker), 헐버트(H.B.Hulbert), 에비슨(O.R.Evison) 등이 직접 기고하여 이를 언더우드가 번역하여 게재했다.
[형태]
『그리스도신문』은 초기의 경우 대체로 국배판, 각 호당 8~12면, 한글 4호 크기, 3단의 순한글 내려쓰기 주간신문으로 구성되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도신문』은 1897년 4월 1일 장로교회 신문으로 출발한 초기에 해당하는 신문이 8호 정도 있는데, 그 중 1권 3호는 31.0㎝×22.8㎝이다.
1905년 7월 1일 장감연합 신문으로 재출발 후 국판, 각면 2단, 총 12~20면 내외로 하였으며, 간행된 것으로는 제10권 7~23호, 30호, 32~37호, 제11권 4~7호, 9,10,18호 등인데, 이중에서 10권8호[1906. 2. 22.]의 경우 22.1㎝×14.7㎝, 반엽(半葉) 19행 32자이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도신문』은 총 39점이며, 2020년 현재까지 확인된 『그리스도신문』은 대략 200여 점에 이른다.
1907년 12월 『예수교신보』로 개칭한 후에는 3단 8면으로 편집체계가 초기의 형태로 복귀했으며 격주간 발행하는 신문으로 변했다. 1910년 2월 장감연합 신문 『예수교신보』가 폐간되고, 2월 28일 새로 장로교회 신문 『예수교회보』로 출간한 때에는 4단 8면의 국배판, 한글 4호 활자, 주간 신문이 되었으며, 신문사의 형태는 주식회사로 자본금 1,000원이었고 발행부수가 한때 3,700부로 늘어났다.
[구성/내용]
『그리스도신문』은 초창기와 1905년 7월 장감통합 신문이 된 이후의 모습에서, 필진과 내용 면에 다소의 변화가 있었다. 1897년 언더우드가 개인적으로 창간하여 거의 대부분의 사무를 담당하던 몇년 간, 1면에 논설란을 두고 2면에는 농리편설, 3면에는 공장편설, 4면 기독교 논설, 5면 관보, 6면 성경강론회, 교회통신, 7면 기도회, 8면 외방통신과 국내 각부 통신, 전보, 광고 등을 수록하여 종교 신문이지만, 기독교 외에도 과학기술 문화, 산업, 국내외 소식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고종의 탄일에는 군주에게 충성한다는 창간 취지에도 부합되게 호외를 발행했고, 구독료 1년 선납자에게는 고종의 석판사진을 제공하기도 했다. 1905년 7월 장감합동 신문이 된 후에는 게일이 편집주간, 케이블, 무스, 무어 등이 공동편집인, 빈톤이 재정을 각각 담당하였다. 발행주체는 한국복음주의 선교회 연합공의회였으며, 예수교서회를 통하여 발행했다.
[변천과 현황]
1890년대에는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 신문들이 교파별로 각각 발행되었다. 1897년 4월 1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발행한 주간신문 『그리스도신문』과, 이보다 2개월 앞선 1897년 2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한국 최초의 사설신문으로 발행한 『죠션크리스도인 회보』가 한국 근대 사립신문의 기원이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문들은 모두 개인이 발행하여 편집과 집필까지 거의 대부분의 일을 발행인이 전담했던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최초의 근대적 사립신문인 『죠션크리스도인 회보』는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12월에 신문의 공식 제호를 『대한크리스도인 회보』로 변경했는데, 발행인 아펜젤러가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귀환한 1900년 9월 이후 사실상 발행이 중단되었고, 그후 귀국하는 과정에서 해상교통 사고로 선종한 이후, 더 이상 맥이 이어지지 못하다가 1905년 1월에 가서 미국의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으로 『그리스도인 회보』로 개칭하여 발행을 재개했다. 그러나 발행상의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교회일치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1905년 7월 1일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으로 교파연합 신문인 『그리스도신문』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합 전의 장로교 신문이 면수도 많았고 내용이 풍부했으므로, 통합신문의 제호와 통권수도 장로교의 『그리스도신문』을 그대로 계승하게 되었다. 한국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의 명의로 발행된 통합신문으로서의 『그리스도신문』의 사장 겸 편집주간은 게일 목사가, 공동편집인은 케이블, 무스, 무어 등이 맡았고, 재정은 빈톤이 담당했으며, 예수교서회를 통하여 발행했다. 합동신문은 사설을 통해서 합동발간의 장점을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한국의 속담을 인용하여 합동의 명분과 실리를 강조하면서 실제로 면수도 12~20면으로 늘리고, 체제는 국판 각면을 2단 편집했고 기사 내용도 이전보다 성경과 기독교에 관한 내용을 대폭 증가시켜 영혼구원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었다. 성경론, 만국기도회 문제, 기도회, 때로 읽을 것, 사설, 교회통신, 외국통신, 잡보 등으로 구성하였다.
1906년에 들어서서 통합신문 발행의 경영인이 게일, 언더우드, 무어, 레이놀즈까지 여러차례 바뀌었으며, 편집진에는 새롭게 존스가 참여하였고, 1907년 12월 13일부터 제호를 『예수교신보』로 바꾸었다. 동시에 주간신문에서 격주간 신문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09년부터 1910년 2월 21일 폐간 때까지는 다시 주간신문[월 4회]으로 환원하였다. 『예수교신보』는 개정 전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 체제로 환원하여 3단 8면으로 구성하였고, 활자의 크기를 달리하여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통합신문임을 강조하면서 영문 제호란에 “이전 ‘그리스도신문’을 ‘예수교신보’로 개정함”이라는 글귀를 함께 게재하였다. 신문사 사장으로 게일이 임명되었고, 최초의 한국인 편집인으로 김원근이 참여하였다. 통합신문 운영상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이 겹쳐서 1910년 2월 21일 『예수교신보』가 폐간되자 장로교와 감리교는 각각 『예수교회보』와 『그리스도회보』를 발행하다가, 1915년 제2차 장감연합의 교회일치운동이 성행하면서 교파별 신문을 접고 1915년 12월 8일 제2차 장감연합 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여 1937년까지 22년간 교파연합 신문으로 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그리스도신문』은 한국 개항기 최초의 기독교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교파적 성격의 주간신문으로서, 기독교 선교 외에도 서구의 근대적 농업과 공업, 과학기술과 각종 정치제도, 문화풍속 등을 게재하여 한국인의 개화계몽과 근대적 서구문물 수용에 일정한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며, 조선 기독교가 확산시킨 문명개화론을 가장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에 이어 한글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한글의 우수성을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여 자주독립을 강조한 창간 취지에도 부합하면서 민족문화 창달에도 기여할 수 있었고,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상징체계의 확정과 결속의 공고화를 통하여 성경 공부, 기독교 교리, 예배의례와 기도회 보급 등 문서선교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신문』이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배경의 하나는 한국 근대화와 기독교 선교에 선구적 역할을 수행해온 숭실대학교의 개교 이념과 『그리스도신문』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온전히 일치했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