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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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宣大院王遺墨 |
영어공식명칭 | Heungseon Daewonwang's Calligraphy |
이칭/별칭 | 대원왕유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지인 |
저술 시기/일시 | 개항기 고종대 - 『흥선대원왕유묵』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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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 |
성격 | 유묵집 |
저자 | 이하응 |
규격 | 세로 31.1㎝|가로 21.9㎝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필적을 모은 책.
[개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 경기도와 강화도 주변 고을의 일들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 8점을 모아놓은 유묵(遺墨)이다. 고종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이라고도 한다.
[저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의 아버지이다.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1863년 고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에 봉작(封爵)되어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실시할 때까지 국정운영을 주도하였다. 세도정치를 주도했던 외척세력을 배제하고 왕권 강화와 체재 개혁 등으로 조선왕조의 내부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통 사회의 해체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화에도 능했기 때문이 그가 남긴 유묵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편찬/간행 경위]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에 소재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형태/서지]
『흥선대원왕유묵(興宣大院王遺墨)』의 크기는 세로 31.1㎝, 가로 21.9㎝이다. 표제는 ‘대원왕유묵(大院王遺墨)’이며 내지의 첫 면에 이도영(李道榮)이 ‘흥선대원왕유묵(興宣大院王遺墨)’이라고 썼다. 이어서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추정되는 글 8점이 장책(粧冊)되어 있는데 두 번째와 네 번째 면 중앙 하단에는 한글로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장인’이라고 새긴 장서인(藏書印)이 날인되어 있다. 8점의 글은 시전지(詩箋紙) 위에 썼고 발신인과 수신인, 날짜 등은 적혀 있지 않다.
[구성/내용]
『흥선대원왕유묵』은 경기도와 강화도 주변 고을의 여러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안산이방(安山吏房)과 서원(書員) 등 지방 아전이나 서리를 단속하고 군병의 실제 인원을 병조(兵曹)에 알리도록 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둘째는 강화도 주변의 군사적 요충지인 장단(長湍), 교동(喬桐), 통진(通津)과 관련된 일에 관한 것으로 장단의 도결(都結) 시행을 폐지하지 않도록 한 일, 교동의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일,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에서 군율을 시행하고 척사비를 내려 보내는 일 등이다.
[의의와 평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남긴 『흥선대원왕유묵』 외에도 『흥선대원군필첩(興宣大院君筆帖)』, 『흥선대원군간찰(興宣大院君簡札)』 등의 묵적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직후 강화도와 경기도, 황해도 연해 지역의 군비 강화와 재정 운영에 관한 것으로 특히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극구 칭찬했던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는 점에서 중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흥선대원왕유묵』에서는 지방 아문의 실무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하급 관리를 단속하고 군사적 요충지인 경기 연해 지역에 관심을 가지며 외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당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