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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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宗實錄地理志 |
이칭/별칭 | 『세종실록』지리지,『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주연 |
저술 시기/일시 | 1425년 - 『경상도지리지』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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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시기/일시 | 1454년(단종 2) -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부록 편찬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성격 | 지리지 |
편자 | 변계량, 정인지 등 |
권책 | 8권8책 |
규격 | 28㎝×20.4㎝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해당하는 과천현과 금천현의 내용이 수록된 1454년에 제작된 『세종실록』에 함께 실려 있는 전국 지리지.
[개설]
1425년(세종 7)에 경상도지리지, 1432년(세종 14)에는 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으며 이 지리지들은 1454년(단종 2)에 약간 보완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되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는 경도한성부를 비롯하여 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강원·평안·함길도 등 8도에 소속되어 있는 328개 군현에 관한 각종 인문지리적인 내용을 파악하여 국가에서 편찬한 최초의 전국 규모의 지리서이다.
『세종실록』의 정식 명칭인 『세종장헌대왕실록』의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권에 함께 실려 있어 『세종장헌대왕실록 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라고도 한다.
[저자]
『세종실록』을 편수하던 정인지(鄭麟趾) 등은 편년체인 『세종실록』에 지리지를 비롯한 몇 편의 지(志)를 부록으로 수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조선의 4대 국왕인 세종은 집권 후 여러 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리지 편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424년(세종 6)에 변계량(卞季良)에게 지리지 편찬을 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지리지 편찬 규정을 정하여 8도에 지시하고 각 도에서는 규정에 따라 지리지를 편찬하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1425년에 「경상도지리지」가 먼저 편찬되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수합된 8도의 지리지를 참고하여 1432년(세종 14) 전국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이후 『세종실록지리지』는 춘추관에 보관되다가 1454년(단종 2)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거쳐 그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형태/서지]
『세종실록지리지』의 규격은 28㎝×20.4㎝ 크기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구성/내용]
『세종실록지리지』는 8도에 소속되어 있는 328개 군현에 관한 각종 인문지리적인 내용이 수록된 지리서이다. 수록 내용은 호구·군정·공부·전결·토산·조운 등 조세 수취에 필요한 경제 사항과 명산·대천·군영·역관·성곽·목장·봉수·관방 등 관방에 관한 사항, 성씨·인물 등 주민들의 신분구성에 관한 사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독특한 기후 조건을 가진 지역과 각 지방의 민속에 대해서도 수록하였다.
동작구 지역에 해당하는 당시 경기도 광주목의 과천현(果川縣)과 금천현(衿川縣)에 대한 정보도 수록되어 있다. 과천현의 명칭변화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인데, 신라가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과주(果州)로 고쳤으며, 1018년(현종 9)에 광주(廣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년(태종 13)에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고쳤으며 별호(別號)는 부림(富林)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산 및 사방경계를 관악(冠岳) 및 동쪽으로 광주(廣州)까지 11리, 서쪽으로 금천(衿川)까지 10리, 남쪽으로 광주의 지경 지석(支石)까지 19리, 북쪽으로 한강(漢江)까지 25리라고 서술하고 있다.
당시 호수 및 인구는 2백 44호, 7백 43명이었으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1명, 선군(船軍)이 70명이라고 서술하였다. 본래 성씨인 토성(土姓)은 손(孫)·이(李)·전(田)·변(邊)이고 망성(亡姓)은 신(愼)·안(安)·최(崔)라고 알려주고 있다. 논이 3분의 1이 넘지만 땅이 메마르며, 경작지인 간전(墾田)이 3천 1백 28결(結)이고,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팥·메밀·참깨·뽕나무·삼,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와 지초(芝草), 도기를 굽는 곳은 1곳이라고 하였다. 특히 노도진(露渡津)과 흑석진(黑石津)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노도진은 노들나루이고 흑석진은 검은돌 나루라고 하여 현대까지 지명이 쓰이고 있다. 동작구의 많은 지명으로 알려진 익숙한 지명이 눈에 띈다.
한편, 금천현의 명칭변화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신라가 곡양(穀壤)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금천(衿川)으로 고쳐, 996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고, 1018년(현종 9)에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1414년(태종 14)에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라 한 이력을 알 수 있다. 이후 금과현은 두 달 만에 혁파되고, 양천현(陽川縣)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금천현감(衿川縣監)이라 하고 별호(別號)는 시흥(始興)이라고 서술하였다. 사방경계는 동쪽으로 과천(果川)까지 14리, 서쪽으로 부평(富平)까지 11리, 남쪽으로 안산(安山)까지 15리, 북쪽으로 노도(露渡)까지 18리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호수 및 인구는 3백 27호, 9백 37명이었으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명, 선군(船軍)이 73명이라고 서술하였다. 본래 성씨인 토성(土姓)은 이(李)·조(趙)·강(姜)·장(莊)·피(皮)·계(桂)이고, 망성(亡姓)은 윤(尹)·추(秋)라 알려주고 있다. 금천현에서는 주요 인물로 강감찬(姜邯贊)에 대해 별도로 서술하고 있다. 논이 전체 땅의 5분의 2가 되고 기름진 것과 메마른 땅이 반반이며 경작지인 간전이 2천 7백 62결(結)이다. 토의는 오곡(五穀)과 조·팥·녹두·메밀·수수[唐黍]·참깨·뽕나무·삼[麻]이고 토공(土貢)은 지초(芝草), 약재(藥材)는 백변두(白扁豆)라고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역과 목장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실록지리지』는 실록에 함께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쉽게 열람하고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29년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 독립된 『세종실록지리지』 8권 8책이 편찬되어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에 활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국 지리지의 간행 성격을 통해 『세종실록지리지』의 편찬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통치체제를 정비해가는 과정에서 상호 긴밀한 연관 속에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는 고을별로 일정한 항목에 따라 편찬된 전국 지리지라는 점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지역의 변화 상황을 수록하여 지방관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려 했던 조선 초기의 지방행정의 방향성과 전국적인 규모의 인문지리 정보를 잘 보여주는 자료 중의 하나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