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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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江水死者弔魂碑 |
영어공식명칭 | The Hangang River's memorial in a drowned perso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원재연 |
건립 시기/일시 | 1929년 6월 - 한강수사자조혼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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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복원 시기/일시 | 1970년 - 큰 홍수로 비석이 쓰러짐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85년 - 한강 인명구조대원인 김평산이 일으켜 세움 |
현 소재지 | 한강수사자조혼비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사무소 앞 한강변 |
성격 | 진혼비(鎭魂碑) |
관련 인물 | 김평산 |
크기(높이,너비,두께) | 전체 높이 2m|비신 너비 54㎝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있는 한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1929년 용산기자단이 건립한 위령비.
[개설]
대한제국기부터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까지 한강에서는 여러 번의 큰 교량 공사가 있어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이 실족하여 익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여기에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특히 많은 익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1922년 경부터 매년 7월 익사자들을 위한 위령제(慰靈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1929년 6월, 용산기자단의 몇몇 유지들이 위령제를 계속 거행하는 한편 익사한 사람들의 영혼을 특별히 조문하기 위해 세운 것이 한강수사자조혼비(漢江水死者弔魂碑)이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사무소에서 가까운 한강 변에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워 한자를 새기고 조혼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1970년 홍수로 인해 비석이 쓰러져서 방치되어 오다가 1985년 한강에서 인명 구조활동을 벌이던 김평산이 다시 비를 일으켜 세웠다.
[건립 경위]
1900년 7월 한강철교 공사와 1917년 한강인도교 공사 등으로 한강에 근대적 대형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경험과 시공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안전수칙에 밝지 못한 인부들이 다수 익사하는 사고가 생겼다. 이에 1922년경부터 익사한 교량 건설 인부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7월 위령제를 거행하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1925년에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하여 무수한 인명이 한꺼번에 익사 당하는 큰 재난을 당했다. 이에 1929년 6월에는 위령제를 지속적으로 거행하면서 수많은 익사자 영혼들을 조문하기 위해서 용산기자단의 몇몇 유지들이 한강수사자조혼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위치]
2020년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의 본동사무소 앞 한강 변에 세워져 있다.
[형태]
2단의 기단과 그 위에 세워진 비신의 형태로 되어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 2m, 비신의 너비 54㎝으로 2층 기단 위에 긴 직사각형 비신을 세로로 세워둔 형태이다.
[금석문]
비신에 한자로 ‘한강수사자조혼비(漢江水死者弔魂碑)’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한강수사자조혼비는 인명구조대원인 김평산이 다시 비를 일으켜 세운 뒤로부터 2020년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1929년 6월에 건립된 한강수사자조혼비는 근대 문명의 상징처럼 여겨져 온 철도 공사로 촉발된 인부들의 실족으로 인한 익사사고로 1922년경부터 시작된 매년 7월의 위령제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는 100년에 한번 일어날까말까 한 대홍수로서 무수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초래했으며 한강에 익사한 사람들의 영혼을 특별히 위로해줄 조혼비를 건립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한강수사자조혼비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를 건설한 역군들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대홍수로 익사한 무수한 영혼들을 조문해주는 한국 근대 사회사의 상징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