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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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實尾島 事件 |
영어공식명칭 | Silmido Uprisi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74[대방동 49-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민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71년 8월 23일 - 실미도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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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장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74[대방동 49-6] |
[정의]
1971년 8월 23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서 북파공작부대 684부대와 군경간에 교전한 사건.
[개설]
실미도 사건은 3년 4개월 동안 북파를 목적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면서 비롯됐다. 특수부대원들은 서울로 진입을 시도하였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인근에서 군경과 교전,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이 사망했고, 공작원 또한 20명이 사망했다. 생존한 4명의 공작원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72년 3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역사적 배경]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북한 무장 게릴라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하는 사건[김신조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후인 1월 23일 북한이 원산항 근처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호를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미국 승무원 83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촉즉발 정세에서 박정희 정권은 독자적인 대북보복 방침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일성 거처를 습격할 특수부대, 일명 ‘실미도 특수부대’를 1968년 4월에 창설하였다.
[경과]
이른바 김신조사건을 계기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에 보복할 목적으로 공군 산하 684 특수부대를 실미도에 창설하였다. 창설을 맡은 중앙정보부는 현역사병 계급 부여, 교육수료 후엔 하사관 또는 장교 임관, 상당액의 특수수당 지급, 북한 침투 귀환 후엔 후방에서 교관 등으로 채용하는 조건으로 교도소와 갱생보호회 등에서 부대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고 형편없는 급식에 서신 왕래와 휴가, 외출, 외박 등 기본권이 모조리 박탈당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부대원 모집 당시 북파 공작 임무의 위험성과 공작원 신분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된 훈련 중 7명이 사망하고 가혹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부대원들은 어떤 신변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비인간적인 훈련만 받아야 했다.
1971년 남북정상회담 논의를 비롯한 남북간 화해모드가 조성되자 대북 보복 전략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 결과 684 특수부대는 애초 목표와 달리 북파 임무가 주어지지 않고, 장기간 격리생활로 부대이탈과 사망사고, 인권유린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당시 박정희 정권은 공작원 신분 변경이나 부대 해체 등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부대원 24명은 1971년 8월 23일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와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삼거리에서 군경과 대치하게 되며 총격전을 벌였다. 교전과정에서 경찰 2명과, 사건에 휘말린 민간인 6명도 사망했다. 결국 부대원들은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하였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에 처해졌다.
[결과]
당시 박정희 정권은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였고, 언론에는 무장공비 혹은 특수범의 폭동으로 조작 발표했다.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와 후속 보도를 하지 못하게 언론을 통제하였다. 생존자들도 비공개 군사재판을 통해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했다. 실미도 사건의 전모가 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2000년대 초반 이후였다.
[의의와 평가]
실미도 사건은 1960년대 후반 남북한 긴장이 고도로 높았던 시기와 1970년대 초 화해모드로 전환되는 시기에 걸쳐 발생했다. 1970년대 들어서며 당시 미국 닉슨 정부는 중국과 핑퐁외교[1971년 4월]를 펼치면서 수교준비를 다져나갔고 한국에게도 남북화해를 유도했다. 이런 정세에서 684 특수부대원들은 북파 공작원에서 간첩으로 조작되며 버려졌다. 따라서 실미도 사건은 냉엄한 국제 정세 속에 국가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버려진 현대사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유한양행 건물 앞 도로에는 ‘실미도 사건 현장’이라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