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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청년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97
한자 鷺梁津靑年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노강구락부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노강구락부에서 노량진청년회로 개칭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일제 강점기인 1924년 가을 노강구락부로 출발하여 1926년 7월 27일 노량진청년회로 개명하였고, 용흥청년회와 함께 노량진 일대에서 양대 청년 단체로 활동하였다. 기관잡지로 『노성(鷺聲)』을 발간하였으며, 교육부 사업으로 노청학원이라는 야학 강습소를 개설하여 운용하였다.

[설립 목적]

1924년 가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지역의 유지 몇 사람이, 노량진(鷺梁津) 앞의 한강(漢江)을 부르던 별칭인 ‘노강(鷺江)’을 따와 노강구락부(鷺江俱樂部)를 창립하였고, 1926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노량진청년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6년 10월 회장은 조희철(曹喜哲)이었으며, 회원은 70여 명에 이르렀다. 창립 당시에는 사회사업에 많은 활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1925년 홍수시에 구호사업을 크게 전개하였다. 1926년 8월 초에도 매년 홍수기에 큰 피해를 당하는 노량진과 영등포(永登浦) 일대를 구호하기 위하여 구호반(救護班) 2대(隊)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2일 임원회를 개최하여 신사업(新事業) 방침을 토의하고 기관잡지(機關雜誌)로 ‘노량의 목소리’란 뜻의 『노성』을 발행하기로 결의하고, 발행위원으로 편집부에는 현 회장 조희철 외 2인, 서무부로 안순익(安淳益) 외 5인을 구성하였다.

1926년 10월 18일 동아일보 시흥지국의 후원 아래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 본동리(本洞里)[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위치한 은로학교(恩露學校)[현 공립 은로초등학교의 전신] 대강당에서 ‘노량진 추계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날은 갑작스럽게 추운 날씨였는데도 관중이 꽉 찬 가운데,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의 홍병선(洪秉璇)이 ‘교육과 조선의 장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의 유각경(兪珏卿)이 ‘우리는 배움으로 나가자’라는 주제로 각각 1시간씩 열변을 토하였다.

1927년 11월부터 회원들의 교양을 목적으로 70여 명의 회원이 일제히 금주하는 동시에, 수양(修養) 강좌를 개최하여 약 2개월 동안 매일 밤 지식 함양에 치중하였다. 1928년 4월 7일 은로학교 제2강당에서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임원을 선출한 뒤, 토의사항에 들어가서 ‘금주 선전에 관한 건’·‘문맹 타파 운동에 관한 건’·‘염색의(染色衣) 착용 장려에 관한 건’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이 날 당선된 임원으로는 회장 조희철, 부회장 안순익이었다. 1928년 4월 15일에는 모든 회원이 총출동하여 정복·정모를 갖추고 회기(會旗)를 선두로 “우리의 살길은 금주에 있다” 등의 5·6개의 선전 깃발을 날리면서 행진 나팔을 울리며 흑석리(黑石里)를 비롯하여 노량진·영등포·도림리(道林里)·양평리(陽坪里)·당산리(堂山里)까지 행진하였다.

1929년 6월 2일에는 동아일보 시흥지국의 후원 아래, 노량진소년척후대(斥候隊)와 공동으로 ‘제1회 전기호(全畿湖)소년축구대회’를 노량진 신설 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이어 같은 달 11일에는 한강 인도교 아래에서 동아일보사 시흥지국이 주최하는 ‘제2회 시흥추천(鞦韆)대회’를 후원하여 개최하였다.

1931년 4월 11일에는 제5회 정기총회를 은로학교 내에서 개최하고 회장 민종원(閔鍾源), 부회장 이주성(李柱成)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동아일보사 시흥지국의 후원 아래, 이해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은로학교 교정에서, 금주와 교육 등을 각본으로 소인극(素人劇)을 주최·개연하고 일반 시민에게 무료로 관람케 하였다. 1932년 2월 10일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시흥지국의 공동 후원 아래, 노량진 춘경원별장(春景園別莊)에서 ‘제2회 기호 척사(擲柶)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1월 5일부터는 청년회의 교육부 사업으로 노청학원(鷺靑學院)을 개설하여, 청년회의 간부 이주성 등 수 명이 교사가 되어 은로학교 강당을 빌려서, 무산(無産)아동에게 교과서·공책·연필 등까지 무료로 배부하며 야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가가 나지 않았으므로 노청강습회로 무산아동 교육을 계속하였으나 인가 문제로 잠시 중단되었다. 동년 11월 26일 강습회로 정식인가를 얻었고, 1930년 4월 12일에는 은로학교에 강당에서 노청학원 수업식과 학예회를 열었다. 그러던 중 일제는 1932년 9월 인가가 없다는 이유로 학원 폐지 명령을 내려 4~5년간 지속되었던 학원 운영을 중단시켰다. 학원장 민종원 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열성으로 탄원하여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1933년 5월 1일 민종원 원장 등의 교사와 다수의 내빈 및 130여 명의 무산아동들이 집회하여 성대하게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 1월부터 유지 청년 마종연(馬鍾溎)이 경영을 인수한 뒤 부인 우혜영(禹惠英)과 함께 온 가족이 헌신하여, 180여 명의 무산아동에게 보통학교 4학년제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수준까지 발전하였다.

1935년 7월 20일부터는 약 10일간 학원의 하기 휴가를 맞아, 마종연·우혜영 등이 강사가 되어 18세 이상의 문맹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교과서·학용품을 무료 제공하면서 단기(短期) 부인한글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까지 10회의 졸업생 총 320여 명을 배출하였고, 동년 4월 현재 220여 명이 재학하였다. 그러나 1936년부터 경영권이 은로학교의 일본인 교장에게 일임된 뒤 은로학교의 직원들이 가르치다가, 1938년 은로학교가 공립소학교로 승격하자 교실을 빌려주지 않음에 따라 노청학원은 폐쇄된 듯하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1926. 8. 8·13·15, 10. 18·20 ; 1928. 4. 11·18 ; 1929. 5. 8·19, 6. 9, 12. 2 ; 1931. 4. 15·24 ; 1932. 2. 5. ; 1933. 5. 6. ; 1935. 5. 29, 7. 19.)
  • 『조선일보』 (1932. 3. 1. ; 1935. 6. 7, 7. 19 ; 1936. 9. 14. ; 1938.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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