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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옥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94
한자 辛壬獄事
이칭/별칭 신임사화(辛壬士禍),임인옥(壬寅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차인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717년(숙종43) - 숙종(肅宗)과 좌의정 이이명(李頤命)과의 정유독대(丁酉獨對)로 세자교체 논의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1년(경종1)연표보기 - 신임옥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722년(경종2)연표보기 - 신임옥사 종결
성격 조선 후기 정치 사화(士禍)
관련 인물/단체 노론|소론|김창집(金昌集)|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목호룡(睦虎龍)|연잉군(延礽君)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었던 사충서원 배향인물들이 희생된 조선 후기 정치 사화.

[개설]

신임옥사(辛壬獄事)는 1721년(경종1) 신축년(辛丑年)과 1722년 임인년(壬寅年) 두 해에 걸쳐 연잉군(延礽君)[후의 영조(英祖)]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문제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서 발생한 역옥(逆獄)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간 세자 책봉과 대리청정 등의 문제를 두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경과]

1721년(경종1)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우의정 이이명(李頤命) 등 소위 노론 4대신은 소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잉군을 왕세제 책봉을 주도했고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요구했다.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박필몽(朴弼夢), 이명의(李明誼) 등이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趙聖復)과 노론4대신 등이 역모를 품었다고 주장하여 이들을 처벌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결과]

이듬해 1722년(경종2)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경종 시해 음모를 고변(告變)함으로써 노론 4대신이 참형에 처해지고 일파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의의와 평가]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집권하자 1725년(영조 1) 희생된 노론4대신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목호룡의 고변’을 무고사건(誣告事件)으로 처분하였다. 나아가 영조는 이들 4대신에게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諡號)를 내린 후, ‘그 영혼을 위로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과천(果川)의 반계(盤溪)에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還局)으로 소론 정권이 집권하면서 4대신이 또다시 역적으로 몰려 사우 또한 철폐되었지만, 1740년(영조 16) 소위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4대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신원되었다. 철폐된 사우는 소론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1755년(영조 31)에 사충사(四忠祠)로 복설되었다. 사충서원(四忠書院)이 과천[노량진]에 건립된 이유는 4대신이 모두 과천 땅에서 왕래하였고, 지역 유생들이 소원하였으며, 사육신의 서원과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충서원은 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 당시에도 존속했지만, 1927년 서원이 철도부지로 편입되면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로 이건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원이 파괴된 후, 1968년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100-2에 이전하여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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