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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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石津 |
이칭/별칭 | 검은돌 나루,흑석나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차인배 |
[정의]
조선 시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한강 남안에 설치되었던 나루.
[개설]
흑석진은 한강 남안 동작진(銅雀津)과 노량진 사이에 위치한 나루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근대 시대 강과 바다는 단절의 공간이자 교통의 매개였다. 강변에 나루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통상적으로 도하거리를 줄이기 위해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 입지하였으나, 이후 점차 주요 교통로 상에 조성되었다. 나루는 강폭에 따라 도(渡), 진(津), 제(濟), 섭(涉) 등으로 불렸으나, 점차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현재는 하나의 지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한자표기로 포(浦)나 바다의 항(港)을 차용하기도 하였으며, 주요군사시설이 운용되었을 때는 진(鎭) 혹은 진(陣)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한강에는 도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 신천진, 독도진, 입석포, 두모포, 한강도, 서빙고, 동작진, 흑석진, 노량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진, 양화도, 공암진 등 20여 개의 나루가 설치되었고, 시기에 따라서 각 나루는 진(津) 혹은 도(渡)로 혼재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한강 나루 중 국가가 관리하는 진도를 11개소로 열거하고 있으나, 교통수요 등에 따라 그 수는 가감되었다.
[내용]
민간에 ‘원래 흑돌(黑石), 늙은 돌, 노돌이라는 경관 명에서 노돌강, 혹은 노들강이 되었고, 이것이 노량진이 되었다’는 구전을 통해 노량과 흑석은 별개의 지역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관에서 운영하는 노량진 바로 옆에 사선(私船)이 운영되던 곳을 흑석진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흑석진은 단순히 인원의 도강(渡江)을 위한 나루이기 보다 별도의 중요 기능이 있었다. 바로 수참(水站)인 흑석참(黑石站)의 설치다. 수참은 한강 물길을 이용하여 각 지역에서 수취한 미곡 등을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 조선 시대 조운(漕運)의 근간이다. 한강 수계에 충주 금천참(金遷站), 강원도 원주 흥원참(興元站 혹은 興原站), 과천 흑석참 등 6~7개의 수참이 있었다. 흑석진에는 참선(站船) 15척을 두었고 수운을 담당하는 노비도 20명이 배속되었다.
조선 시대 각 진도(津渡)에는 관선(官船)인 진선(津船)을 두었으며, 조선 후기 기록에서 그 수효를 살펴보면 광진 4척, 송파진 9척, 삼전도 3척, 신천진 2척, 양화도 9척, 공암진 5척, 철관진 1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한강도와 노량도는 각 15척이 배치되어 두 나루가 가장 크고 통행량이 가장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빙고진과 동작진에 통행량이 증가되어 한강도와 노량도에서 각 5척을 이동 배치하기도 하였다.
흑석진은 한강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았던 노량진과 역시 통행량의 증가로 편입된 동작진 사이에 위치한다. 그런데 흑석진은 국가 관리 진도체계에 포함된 나루는 아니었다. 한강에는 국가가 직접관리 운영하는 진도 외에도 민간이 사선을 운행하는 나루들이 많이 있었는데, 흑석진도 그 중 하나이다. 관선인 진선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했지만 기찰이 심하고, 또 일부 관원들의 횡포가 있어,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사선 나룻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변천]
수참은 숙종-정조 연간에 점차 혁파되었고, 19세기 이후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 시기, 흑석참도 폐지되고, 인근에 동작진이 확대 개설되면서 흑석진은 점차 기능을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