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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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鷺梁津|露梁津 |
이칭/별칭 | 노들나루,노도(露渡),노량(鷺梁, 路梁, 露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차인배 |
[정의]
조선 시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부근에 설치되었던 나루.
[개설]
노량진은 한강 남안에 위치한 나루의 명칭으로 조선 시대까지 도성과 한강 이남지역을 이어주는 교통의 주요 요지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근대 시대 강과 바다는 단절의 공간이자 교통의 매개였다. 강변에 나루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통상적으로 도하거리를 줄이기 위해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 입지하였으나, 이후 점차 주요 교통로 상에 조성되었다. 나루는 강폭에 따라 도(渡), 진(津), 제(濟), 섭(涉) 등으로 불렸으나, 점차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현재는 하나의 지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한자표기로 포(浦)나 바다의 항(港)을 차용하기도 하였으며, 주요군사시설이 운용되었을 때는 진(鎭) 혹은 진(陣)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강에는 도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 신천진, 독도진, 입석포, 두모포, 한강도, 서빙고, 동작진, 흑석진, 노량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진, 양화도, 공암진 등 20여 개의 나루가 설치되었고, 시기에 따라서 각 나루는 진 혹은 도로 혼재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 『속대전(續大典)』 병전(兵典), 외관직, 『대전통편(大典通編)』 이전, 외관직, 경기(京畿), 『대전통편』 병전, 외관직, 경기조에 노량진 관련 기사가 있다.
[내용]
노량진의 한자 명칭은 ‘鷺梁’, ‘路梁’, ‘露梁’ 등 다양하게 표기하는데,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노들나루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차이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노량진은 한강진, 양화진과 함게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노도강변 백사장에서 화포(火砲)를 시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사훈련지로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 노량도((露梁渡)는 양화도, 한강도, 삼전도, 광진도 등과 함께 한강 5대 진도로 수륙 교통의 중심이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노량진은 국왕의 행차에 배다리[舟橋]가 설치되었는데, 특히 정조(正祖)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릉원에 능행(陵行)할 때 이곳에 주교를 설치하여 왕래하였다.
조선 후기 각 진도의 관선(官船)인 진선(津船) 수효를 살펴보면 광진 4척, 송파진 9척, 삼전도 3척, 신천진 2척, 양화도 9척, 공암진 5척, 철관진 1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한강도와 노량도는 각 15척이 배치되어 두 나루가 가장 크고 통행량이 가장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빙고진과 동작진에 통행량이 증가되어 한강도와 노량도에서 각 5척을 이동 배치하였다.
[변천]
조선 후기 숙종(肅宗)대 금위영(禁衛營) 창설을 끝으로 도성수비를 위한 오군영체제가 완성되었는데 노량도는 당시 신설된 금위영의 관할하에 배속되었다. 이때 노량도를 비롯해 양화도, 한강도, 삼전도, 임진도 등 함게 5개 진도에 군영의 별장이 파견됨에 따라 도성 방비의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강, 임진, 노량, 낙하, 삼전, 양화 등 오도(五渡)에는 종9품인 도승(渡丞) 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도승은 『속대전』에는 별장(別將)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소속 아문을 병조(兵曹)로 이관하였다.
[의의와 평가]
노량진은 각지의 사람과 물산이 한강을 건너 오가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교통량이 많았던 나루였다. 조선 후기 도성 방비체계가 강화되면서 도성의 한양 수비를 위한 군인들의 주둔지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