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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73
한자 衿州
이칭/별칭 금주(黔州),시흥(始興)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오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940년연표보기 - 곡양현에서 금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995년 - 금주단련사 설치
개정 시기/일시 1005년 - 금주단련사 폐지
개정 시기/일시 1018년 - 금주가 수주에 예속
개정 시기/일시 1069년 - 금주를 경기에 예속
개정 시기/일시 1172년 - 금주, 감무(監務)를 파견
개정 시기/일시 1390년 - 금주를 경기좌도에 예속
폐지 시기/일시 1414년 - 금천현, 과천현을 통합하여 금과현 설치
관할 지역 금주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지도보기|신대방동지도보기|상도동지도보기

[정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서쪽 부분에 해당되는 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을 포함한 지역을 관할하는 고려 시대의 지방행정구역.

[개설]

금주는 고려 전기에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과 더불어 영등포구, 관악구, 금천구의 대부분과 구로구 동부 지역, 그리고 광명시 및 안양시 석수동 등지를 포괄하고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시대에 들어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가체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940년(태조 23) 3월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곡양현(穀壤縣)금주로 개칭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2, 세가2, 태조 23년 3월, 『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왕경 개성부, 『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고려사』 권77, 지31, 백관2, 외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목종 8년 3월, 『세종실록(世宗實錄)』 148권 지리지, 경기 광주목 금천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0, 금천현에 금주 관련 기사가 확인된다.

[내용]

금주는 삼국 시대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편제하면서 한 지역으로 묶이게 되었다. 삼국 시대가 종료된 이후 신라가 영토를 9주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757년(경덕왕 16) 잉벌노현곡양현(穀壤縣)으로 개칭하고 율진군(栗津郡)의 속현으로 만들어 한주(漢州)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각 지역의 이름을 고치게 하면서 곡양현금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성종 때 시흥(始興)이라는 별호가 정해지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인 1378년(우왕 4)에는 내륙으로 침입한 왜구에게 두 차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금주’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지속되다가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과 합쳐 금과현(衿果縣)으로 재편되었다.

[변천]

금주는 고려 성종 대에 지방 지배의 강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요지로 지목되어 995년(성종 14) 금주단련사(衿州團練使)가 파견되었던 바 있다. 1005년(목종 8) 단련사가 혁파되었으며, 고려 전기 지방 통치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게 되었다. 1069년(문종 23) 경기의 영역이 일시적으로 확대되면서 경기에 속하였다가 이후 양광도에 속하였으며,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지방관으로서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다시 확대 재편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눌 때 금주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1414년(태종 14) 인접한 과천과 합쳐 금과현(衿果縣)이 되었다가 다시 양천과 합쳐 금양현(衿陽縣)이 되었으나 모두 폐지되고 1416년(태종 16) 금주의 영역은 금천현(衿川縣)으로 편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인접한 과주와 더불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을 각각의 관할지에 나누어 포함하고 있다. 고려 성종 때 시흥이라는 별호가 붙었으나 현재의 시흥시 영역과는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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