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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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일수 |
[정의]
6·25전쟁 초기 한강방어전투의 전개 및 전후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의 복구 과정
[6.25전쟁 초기 동작구의 한강방어선]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면 남침을 단행한 북한군은 3일만인 28일 새벽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전달 받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의 폭파를 지시하였다. 최창식 대령은 공병학교장 엄홍섭 중령에게 폭파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엄홍섭 중령은 공병학교 교관들을 동원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경 인도교와 철교의 폭파를 단행하였다. 한강인도교[현재의 한강대교]는 2·3·5번 ‘타이드 아치(Tied Arch)’ 3개 경간(径間)과 거더(Girder) 일부분이 파괴되었으며, 폭파 당시 500~800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강철교의 경우 1950년 6월 당시 경인선 단선 상행[A선, 1900년 완공]과 하행[B선, 1911년 완공] 그리고 경부선 복선[C선, 1944년 완공] 이렇게 3개의 교량으로 구성되었는데, B선과 C선의 폭파에는 성공하였으나 A선, 즉 경인선 상행선 단선철교의 폭파에는 실패하였다. 폭파를 위해 공병대가 폭약을 재차 장전하는 동안 멀리서 북한군의 포탄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국군 수도경비사령부, 제1공병단 및 전방 철수 부대들이 시가전을 전개한 관계로 미아리방어선 돌파 이후 10시간 정도가 지나 한강 변에 도달하였다.
6월 28일 오후 2시부터 한강방어선을 지휘하기 시작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북한군이 폭파되지 않은 철교를 이용하여 한강을 집중 도하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김홍일장군은 27일 창동전투와 28일 미아리전투 이후 무질서하게 흩어져 한강을 건너온 부대를 수습하여 혼성 제7사단을 편성한 뒤, 이를 유재홍 준장에 맡겨 노량진에서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이르는 방어선을 지키게 하였다. 유재홍 준장은 한강 교량 폭파 임무를 수행하였던 제1공병단과 공병학교 병력을 주축으로 재편된 혼성 1개 대대를 한강 인도교와 철교 사이에 위치한 39고지[현재의 사육신역사공원]와 월파정[현재의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 인근]에 배치하여 북한군을 막아내고자 했다. 북한군은 29일 오후 수도고지[노량진수원지 인근] 방향으로 도하하여 공격을 시작하였고, 혼성 제7사단은 백병전까지 감행하며 치열한 방어전투를 펼쳤다. 7월 1일에는 39고지와 월파정에서도 공방전이 벌어졌다. 7월 3일 새벽 4시가 되자 북한군은 기관차에 전차를 싣고 경인선 상행철교를 통해 한강을 건넜고, 이날 오전 11시 더이상 방어선을 지킬수 없게 된 국군은 시흥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국군이 노량진 일대를 중점 방어할 것으로 보고,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과 본동 사이 그리고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과 흑석동 경계, 이렇게 두 곳에 자리한 능선을 목표로 도강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유재홍 준장은 6월 29일부터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서 증편된 부대 중 제9연대를 현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배치하여 도강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했다. 제9연대는 흑석동 고지[현재의 중앙대 동쪽 능선이자 국립현충원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6월 29일부터 7월 2일에 걸쳐 한강변 효사정 부근으로 도강한 북한군과 방어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제9연대 역시 7월 3일 북한군 전차가 경인선 상행철교를 통해 한강을 넘어 오면서 관악산을 넘어 안양 방면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국군은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간 여의도-영등포 구간과 더불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작동 일대에서 한강방어선을 유지하였다. 이는 당시 군 수뇌부와 미군이 목표로 했던 3일을 넘어서는 결과였다. 6·25전쟁 초기 한강방어선이 조기에 무너졌다면 미군이 지상군과 전투장비를 투입할 시기를 놓쳐 전세를 만회하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처럼 북한군의 공세를 일정 기간 이상 지연시킴으로써 향후 전황을 반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전재복구와 동작구]
6·25전쟁에서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의 피해는 초기 한강방어선 전투와 관련하여 집중되었다. 한강 인도교뿐만 아니라 철교 또한 1950년 7월 이후 미 공군의 폭격이 이어지면서 교량 3개 모두가 파괴되었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A선으로 27번 교각과 6·7·8번 트러스(Truss)가 완파, 물에 가라앉아버렸고 B선은는 노량진 방면으로 첫 경간이 완파되었으며 C선은 21·25·26·27·31 경간이 완파 또는 반파되었다. 한강인도교 남단에서 노량진역 앞을 지나 영등포 도림교에 이르는 경인가도 구간 또한 피해를 입었고 노상을 달리던 전차의 운행도 중단되었다. 특히나 어느 정도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한강방어선의 주요 전장이기도 했던 한강인도교 남단에서 노량진역 사이 구간은 전투로 인한 피해가 집중되었다. 노량진수원지는 펌프장을 비롯하여 전체 시설의 40%정도가 손실되었다.
파괴된 시설 중 한강 인도교와 철교의 경우 전쟁 중에는 파괴된 부분을 임시로 복구하여 사용하였다. 한강인도교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됨과 동시에 복구공사에 들어갔지만 1951년 1.4후퇴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이후 임시 가교와 마포·서빙고 등지에 군용부교를 가설하여 이용하였다. 한강철교의 경우 서울 재수복 이후인 1951년 4월 경인선 상행선[A선]의 가복구에 착수하여 6월에 완성을 보았으며, 1952년 2월부터 경인선 하행선[B선]에 대한 가복구가 진행되어 7월에 완료되었다. 영등포-노량진 전차 노선은 1952년 5월부터 복구에 들어갔고, 1953년 5월 15일부로 노량진-신길동 구간의 전차 운행을 재개하였다. 전쟁 중 파괴된 전차를 보충하기 위해 경성전기가 들여온 미제 전차 20대 중 6대가 복구된 영등포-노량진 구간에 투입되었다. 노량진수원지는 2개월 여의 공사끝에 1952년 6월 재가동에 들어갔다. 당시의 복구 공사 전반은 미8군 공병단이 주도하거나 또는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진행되었다.
한편 1952년 3월 6·25전쟁 복구를 위한 도시계획 변경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변경된 가로망은 주로 피해가 극심했던 도심 정비를 위해 적용되었고,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은 「경성시가지계획」으로 결정된 가로망과 대동소이했다. 다만 당시의 계획 중 한강인도교 남단에서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을 지나 동작동에 이르는 도로의 노폭을 15m에서 25m로 확대하여 설정한 점은 주목된다. 해당 도로는 1955년 7월 국군묘지[현재 국립서울현충원]가 설치된 이듬해인 1956년 1,293m 구간에 대한 확장이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에도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대한 복구 공사는 이어졌다. 한강인도교는 1953년 12월 파괴된 3개 경간 구간에 나무다리를 부설하여 보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어서 1954·1955년의 미국 국제원조처[ICA] 원조자금을 통해 강재(鋼材)를 위시한 건설 자재 50만 달러분의 발주에 들어가 1957년 1월 경 대체로 확보하게 되었다. 뒤이어 3월부터는 ‘타이트 아치’의 제작에 들어갔다. 한편 한강철교 경부선 복선[C선]은 1955년 12월부터 미국 대외활동본부[FOA] 원조를 통해 복구에 들어가 1957년 7월 완공을 보았다.
한강철교 C선이 복구되자 기존 가복구된 A선과 D선은 각각 자동차 통행과 인도용으로 한강인도교 복구 기간 동안 임시 사용하도록 하고,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위한 건설업체 선정에 들어갔다. 입찰 당시 5년에 걸쳐 한강철교 3개 선을 복구해 왔던 흥화공작소에서 단돈 1천환에 응찰하여 논란이 일었는데, 결국 흥화공작소의 응찰을 무효로 하고 차순위 최저가 입찰자였던 현대건설과 4천650만환에 계약을 체결하였다. 현대건설이 진행한 한강인도교 ‘타이트 아치’ 가설 및 상판 교면 기타 수선공사는 1957년 9월 착공하여 1958년 5월 개통하였다. 공사에는 총경비 9억7천만환, 연인원 11만명이 투입되었다. 한강인도교 복구 공사는 당시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현대건설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또한 한강철교 A선과 B선은 1966년 2월 복구사업계획을 수립하고 대일청구권자금 89만2천달러를 제공받아 1967년 8월 28일 착공하였다. A선은 교각 5기를 비롯하여 트러스 61.0×10련과 거더 24.4×9련을 시설하였고 B선은 거더 18.3×12련을 시설하였으며, 그외 교각 5기에 전력설비를 이설하였다. 전체 공정은 1969년 6월 28일 마무리되었다. 총공사비 6억5천900만원과 연인원 7만5천명이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