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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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일수 |
[정의]
1936년부터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적용되기 시작한 경성시가지계획의 내용과 실재
[경성시가지계획 시행과 동작구 지역]
경성부는 1936년 3월 26일 고시된 「경성시가지계획구역」에 따라 1읍 8면 71개리 및 5개리 일부를 편입하여 이른바 ‘대경성’이 되었다. 종전 36.18㎢의 약 3.64배인 133.9㎢에 달하는 행정구역 확장은 이후 진행될 경성시가지계획의 적용 범위와 실재 행정구역을 일치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확장에서 주목되는 점은 한강 이남의 유망한 공업지역이었던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의 경성 편입이었다. 영등포는 1910년 국권피탈 이후 경의선·경부선 철도가 가져다주는 운수의 편리함을 이용하여 조선피혁주식회사[1911년],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1923년] 등 식민지 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대규모 공장이 들어섰고, 특히나 1931년 일본에서 「중요산업 통제에 관한 법률」이 재정된 이후 1936년 경성부 행정구역이 확장되기까지 조선맥주[1934년], 쇼와기린맥주[1934년]의 양대 맥주회사를 비롯하여 1935년 종연방적이 공사에 들어가는 등 가격 규제를 피하려는 일본 대자본 공장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경성에 포함된 이후에도 동양방적[1937년]·일청제분[1937년]·대일본방적[1939년]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영등포에는 방직·맥주·제분·양조·제재·금속 등 5대 공업을 갖춘 공장지대가 되었다.
따라서 경성으로의 편입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던 1934년 10월 이후 영등포읍민의 상당수는 공장지대에서 확보될 세수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공업도시 발전을 도모하려는 입장이었고, 경성 편입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영등포 공업지역을 경성부에 편입시켜 일원적으로 통제하려고 했던 조선총독부의 의지가 관철되면서 영등포를 포함한 ‘대경성’이 실현되었고,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 중 경기도 시흥군 북면의 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 번대방리[상도천 우안지역,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및 동면의 상도리 일대 14,575,138㎡ 또한 경성의 일부가 되었다.
1936년 12월 26일 고시된 경성시가지계획 가로망 총 220개 노선 중 한강 이남 영등포구역에 해당하는 노선은 모두 51개였다. 이 중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계획된 도로는 모두 22개 노선으로, 대로3류[노폭 25m] 2개, 중로1류[노폭 20m] 2개, 중로2류[노폭 15m] 8개, 중로3류[노폭 12m] 10개로 구성되었다. 이들 도로는 한강인도교 남단에서부터 인천까지 이어지는 기존의 경인가도 구간 중 영등포 도림교 인근까지의 구간 노폭 25m 도로[1939년 대로1류, 노폭 35m도로로 변경되어 경성시가지계획가로망에 포함]를 주간선도로로 놓고 준간선도로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었다. 주간선도로였던 경인가도 중 경성부 관내 구간은 대공황기 실업자 구제를 목적으로 진행된 이른바 궁민구제토목사업의 일환이었던 ‘경성교외간선도로개수공사’의 4개 노선 중 하나로 포함되어 1934년 이미 확장공사를 마친 상태였다. 또한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대홍수’로 유실되었던 한강인도교가 1936년 복구되면서 신용산을 지나 도심인 경성부청까지 연결되었다. 준간선도로로는 대로3류인 노량진역전~신길정[경성부 경계], 번대방정[경인가도]~번대방정[경성부 경계] 2개 도로와 중로1류인 상도정~상도정, 번대방정~번대방정 2개 도로를 들 수 있다.
토지구획정리의 경우 한강 이남에 2개 지구가 설정되었다. 1936년 12월 26일 고시되어 1938년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던 영등포지구에 이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는 1939년3월부터 번대지구가 조성에 들어갔다.
배산임수의 유원지 노량진]
경성시가지계획에서는 우선 한강에 면한 노량진 일대를 경성 부민들이 일상 속에서 잠깐의 여흥을 주는 유원지로 보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의 상도터널 위쪽으로 자리한 안산(案山)과 봉산(鳳山)[현재의 고구동산] 능선은 강건너 북쪽으로 경성 시가지를 바라보고 한강 물줄기를 내려다보아 전망이 좋았다. 뒤로는 관악산을 등져 간단한 산책뿐만 아니라 등산에도 적합했고, 봄에는 벛꽃구경, 가을에는 단풍놀이가 가능했다. 경성 시가지 방면에서 접근성도 좋았다. 전차를 타고 신용산까지만 오면 한강인도교가 지척이었다. 한강인도교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유려한 풍광은 그 자체로 경성 주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였다. 기차가 오가던 한강철교, 저녁 무렵의 한강 낙조, 멀찍이 영등포에 들어섰던 경성방직주식회사는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밤이 되면 강물 중천에 떠있는 달빛과 강바람을 받으며 산책을 즐기려는 남녀들로 가득 찾다. 한강인도교 주변으로는 상류층 인사들이 기생을 데리고 나와 뱃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친구들과 함께 노를 저으며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보트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끼리도 많이 탔다. 게다가 사육신묘와 같은 명승지에도 가 볼 수 있고, 주변 음식점에서 간단히 식사도 할 수도 있어 노량진 일대는 잠깐의 나들이 장소로 훌륭했다.
더욱이 1920년대 이후에는 한강인도교 인근이 경성에서 여름과 겨울 레포츠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자리잡으면서 노량진 일대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여름이 되면 한강에는 수영장이 설치되었다. 더위를 피하려고 한강에서 목욕을 하거나 물놀이를 하다 익사하는 사고를 줄여보고자 경계부표 등의 안전 설비를 갖춘 수영 구역을 설정한 것이었다. 1929년부터는 경성부에서 한강수영장을 운영하였다. 1929~1932년에는 한강 인도교와 철교 중간의 북쪽 한강 변에 길이 1정(町)[약 109m], 너비 25간(間)[약 45m]로, 1933년부터는 한강인도교 상류 600m 지점 북쪽 한강 변에 길이 150m, 너비 50m로 설치되었다. 당시 한강수영장에는 다이방대, 탈의장, 세면소 등도 구비되었으며, 한강물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홍수기간을 제외하고는 여름 동안 일반에 개방되었다.
한편 겨울이 되어 얼어붙은 한강은 거대한 빙상장이 되었다. 스케이트 링크는 한강인도교 아래에 설치되었다. 자연적으로 얼음이 얼고 녹는 시기에 따라 개장과 패장이 결정되었지만, 조명장비를 설치하여 야간에 스케이트를 허용하기도 했다. 해마다 겨울이면 한강에서는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비롯한 각종 빙상대회가 열렸다.
경성시가지계획이 적용되기 시작한 1936년 전후 경성 시가지 내부의 주택 증가 추세나 교외 신편입지의 주택후보지 상황을 비추어 보았을 때 노량진 일대 정도만이 유원지로 조성할 만한 장소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1939년 경성부에 공원계획이 수립되면서 한강에 면한 본동정·흑석정·동작정 일원을 한강공원[405,000㎡]으로 설정하고, 노량진공원[34,000㎡]과 본동공원[140,000㎡]을 두었으며 두 공원 사이 경인가도 구간을 노량진도로공원[290,000㎡]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1941년에는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노량진동~흑석동~동작동에 이르는 한강 남안 고지대를 명수대풍치지구로 지정하여 향후 풍치 유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종 개발행위를 제한하게 되었다.
[영등포의 배후주거지 번대방·상도]
경성시가지계획에서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은 또한 영등포 공장지대의 배후주거지로 주목받았다. 원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은 한강인도교와 면한 본동에서 노량진역 부근에 이르는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임야와 전답의 상태였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는 1930년대 초부터 한강의 경관을 이용한 문화주택 수백 호가 건설되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주거공간 조성은 영등포에 공업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늘어나는 주택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등포 주민 대부분은 의식을 공장에서 얻었 뿐 아니라 경성부민으로도 매일 일터를 쫓아 영등포로 왕래하는 자가 수천을 헤아렸는데 경성시가지계획의 실현으로 일본 대자본 공장의 진출뿐만 아니라 경성 부내의 공장 또한 영등포로 옮겨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등포와 인접한 번대방정[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일대에는 주택·건축의 수가 늘어나는 추세였고, 1939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정한 주거지구로도 설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번대지구를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설정하고 1939년 3월부터 조성에 들어갔다. 번대지구는 번대방정 및 신길정 내 지역으로 한강교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중간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경인가도에 접하고 남쪽으로 경성부 경계에 이르는 장방형 구역이었다. 경인가도에서 경성부 경계에 이르는 대로3류 도로[지금의 여의대방로, 지하철 대방역~보라매역 구간]가 지구의 중앙을 관통하여 지구 남쪽에서 동서를 횡단하는 또다른 대로3류 도로[지금의 장승배기로~상도로 일부~신풍로, 지하철 노량진역~장승백이역~신풍역 구간]와 접속함으로써 경성시가지계획으로 설정된 대로3류의 준간선도로를 아울렀다. 번대지구는 1941년부터 조선주택영단이 지구 내 유휴지(遊休地)를 보유하고 있던 지주들로부터 15,513평을 매입하여 500여 호의 주택단지를 조성하였다. 번대지구 양편 구릉지에는 1939년 각각 번대공원[80,000㎡]과 신길공원[153,000㎡]이 계획되었고 두 공원을 연결하는 지구 남쪽의 대로3류 도로를 번대방도로공원[252,000㎡]으로 조성하도록 결정되었다. 또한 이들 구릉지는 1941년 번대풍치지구로 설정되었는데, 이로써 번대지구를 둘러싼 일련의 녹지 구성이 완성되었다.
한편 조선주택영단은 경성부 소유의 상도정 일대 구릉지 25,646평을 매입하여 1941년부터 주택단지 조성에 들어갔다. 조선주택영단은 현재의 상도터널 남단, 상도역, 숭실대입구역 위치에 3개의 원형 로터리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방사선 도로를 만들었다. 단지 중앙은 지구간선도로인 중로1류 20m 도로[지금의 상도로 일부, 지하철 장승백이역~숭실대입구역 인근 구간]가 통과하였다. 이 간선도로에서 단지 내를 출입토록 4~15m 도로가 가설되어 각 50~90평 내외로 분할된 각 필지에 접하도록 하였다. 상도지구 주택단지는 1944년 12월 총 1,067호[총 대지면적 31,713평]가 완공되었으며, 비탈면을 석축을 쌓지 않고 구릉지를 자연 그대로 이용한 기법으로 건설하여 당시에 가장 잘 조성된 단지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상도지구 주변의 임야 중 일부는 1939년에 상도공원[1,461,000㎡]으로 지정되었는데 1941년 해당 임야의 대부분을 상도풍치지구로 설정함으로써 상도지구를 둘러산 일련의 녹지대 또한 확보될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