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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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일수 |
[정의]
1991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조성된 삼일공원의 유래
[3·1운동과 여성]
3·1운동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주도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이 이루어지자, 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행사에 참석하였던 여학생들은 2.8독립선언의 상황을 국내에 전하기로 뜻을 모았다. 동경여자학원 학생이던 김마리아는 1919년 2월 17일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배낀 뒤 옷 속에 숨겨 부산으로 들어 왔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자신이 2년간 교사로 근무하던 광주, 모교인 정신여학교가 있던 서울 그리고 고향인 황해도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황에스터 또한 뒤따라 입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여성대표를 파견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러 고향 평양으로 향했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3월 2일 이화학당 기숙사에 모여있던 박인덕, 나혜석 등 10여 명의 여학생들과 만나 항일구국을 위한 여성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3·1운동이 태동하였던 서울에서는 각 여학교 학생들이 초기 단계부터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시위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당시 구국을 기원하는 교내 비밀서클을 운영하던 최은희는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준비하던 스승 박희도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기숙사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 70여 명은 학교문이 굳게 잠겨 있자 빗장을 부수고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한편 이화학당의 학생들도 3월 1일 전교생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할 계획을 마쳤으나 이를 눈치챈 학교 당국의 제지로 15명 정도만 담을 넘어 정동으로 몰려든 만세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3·1운동이 시작되자, 서울 소재 각 여학교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2일에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 30여 명이 고종 인산일(因山日)을 위해 준비한 상복을 입고 몰래 학교 담을 넘어 경복궁 앞으로 시위 행진을 벌였고, 4일에도 기숙사생 23명이 다시 담을 넘어 시위에 참여하였다. 서울 시내 학생들이 주도하였던 3월 5일 남대문역전에서의 만세시위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였는데 이때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여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3월 중순으로 넘어가면서 서울에서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전달과 인쇄, 태극기의 제작 배포 등에서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에 대한 검속이 남성보다는 덜 심하였고, 또 장바구니나 아기포대기 등에 감추어 운반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에서의 시위를 주도했던 여성으로 3월 9일 황해도 재령 시위에서의 정신여학교 교원 최선희, 서울에서의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고향인 황해도 백천으로 내려와 3월 30일 백천장터 시위를 주도한 경성여고보 학생 최은희, 그리고 4월 1일의 충청남도 병천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로 유명한 이화학당의 유관순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아니라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부산의 일신여학교, 마산의 의신여학교, 대구의 신명여학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목포의 정명여학교, 평양의 숭의여학교, 함흥의 영생여자중학교와 같이 여학교 자체가 지역 만세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독교 교세가 강하였던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북부 지역에서는 개개의 시위 준비부터 결행에 이르기까지 교회 여신도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3월 2일 개성에서의 만세시위에서는 개성북부교회 여전도사 어윤희와 여신도들이 남성들 보다 앞장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9일 수원, 4월 1일 해주에서는 기생들도 만세시위에 나섰다. 뿐만아니라 비록 여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라도 3·1운동은 모든 지역에서의 만세시위에 반드시 남녀가 함께 참여하였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도 높게 이루어지면서 시위에 참여했다 붙잡히는 여성들도 속출하였다. 특히나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가운데 검거되어 투옥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 욕설이나 모욕, 구타와 고문은 기본이었으며 여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모진 고통까지도 겪어야만 했다. 유관순처럼 옥중에서도 투쟁을 이어나가다가 순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3·1운동 만세시위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든 1919년 5월 이후에도 혈성단애국부인회,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 여성 단체는 10월에 이르러 김마리아가 이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중심으로 규합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등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움직임을 확대해 나갔다.
[삼일공원의 조성]
삼일공원 조성이 맨처음 추진된 것은 1967년 6월 경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형을 받았던 할머니 40명 가량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3동 3만 여평의 국유임야에 무궁화, 소나무 등 1천여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서부터였다. 최저 65세 최고 78세의 이들 할머니들은 1960년 경부터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매년 모임을 가지다가, 전국삼일운동 여성참가자봉사회를 결성하고 남산 어린이 놀이터, 청와대 뜰 등 곳곳에 무궁화 나무를 심어 왔는데, 이를 발전시켜 자손만대에 3·1정신을 유산으로 물려줄 녹원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당시 대표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1925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로 활약했던 고 최은희 여사였다. 여사는 1967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 「독립공원 설립을 제의한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당시 기고문에서는 “서울시에서 가까운 경기도 땅이라도 좋다. 헐벗을 야산 하나를 새로이 택정 해마다 나무를 심고 가꾸어 수십년이 지나면 무성한 숲이 되어 1896년 서재필 박사의 주재로 이루어진 독립공원보다 생생한 상징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공원 설립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이에 서울시의 주선으로 당시 서울로 막 편입된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24번지 일대에 공원 건립이 추진되었다. 이듬해인 1968년에는 건설부로부터 정식으로 공원 허가를 얻었다. 당시 공원에는 독립각, 유래비, 분수, 벤치 등이 마련될 예정이었다. 또한 무궁화 1천 그루로 한반도 모양을 만들고, ‘삼일공원’이라는 글자 모양으로 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공원 울타리는 리기다소나무 5천 그루를 심어 대신할 계획이었다. 공원 조성을 위해 서울시와 『조선일보』의 후원 아래 사회 각계에서 헌수(獻樹)를 받아 7만여 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원조성은 1968년 10월이 되면서 벽에 부딪혔다. 서울시가 갑자기 공원부지 일부를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부이촌동 철거민들의 정착지로 지정하고 500여가구의 입주를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는 300여 가구에 입주증을 발부하였으나, 겨울을 지나면서 300여 가구가 더 들어섰다. 이에 할머니들이 항의하자 ‘행정착오’라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택지 조성을 위해 투입했던 불도저를 철수시켰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실수로 입주를 허가한 300여 호의 처리는 별도로 하되 그 외 무허가 판잣집은 가차 없이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관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은 철거 후의 대책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방관만 하고 있었고, 또 관할 남성파출소 소장은 주민들이 죽기 살기로 집단항의를 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한다고 변명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철거가 미루어지는 사이 무허가 판잣집은 계속 들어서 공원부지는 2,000여 영세민가구의 살림터가 되어 버렸고, 와중에 애써 심어 키운 나무들 대부분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할머니들은 그래도 뜻을 포기하지 않고 엄연한 공원용지임을 알리기 위해 1969년 봄 또다시 묘목을 들고 이곳을 찾았다. 그렇지만 돌무더기를 늘어놓고 생존투쟁을 벌이는 주민들에 밀려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할머니들은 “영세민들의 대책을 따로 세우고 삼일공원을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당국에 호소하였다. 서울시에서는 당시 조성 중이던 광주대단지에 대토(代土)를 주어 전체 수용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에서는 아파트를 신축하여 일부는 입주시키고 나머지는 신속하게 철거하겠다고 하였으나, 모두 식언(食言)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삼일공원 부지는 빈민정착촌으로 자리를 굳혀 버렸다. 그 후 3·1운동에 참여했던 할머니들은 해마다 서너 명씩 세상을 달리했다. 1984년에는 최은희 여사까지 눈을 감았고 삼일공원의 이름은 세간에서 잊힌 이름이 되었다. 이를 남달리 안타까워했던 최은희 여사의 아들 이달순씨는 임종직전까지 자취를 감춰버린 공원을 한스럽게 여기던 고인의 뜻을 받들어 끈질기게 공원재건을 서울시에 건의 했다.
삼일공원이 다시 조성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일대의 불량주택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였다. 특히 1988년 공원 부지 일대의 재개발이 확정되면서 서울시는 당초 계획했던 부지의 일부인 9,000평을 공원 용지로 환원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1990년 겨울 23년만에 공원 조성을 위한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처음 계획했던 크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지만, 3·1라이온스 클럽과 추계문화사업회는 말년에까지 3·1정신을 심기 위해 애쓴 할머니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3·1기념탑’을 세웠다.
이처럼 공원 조성이 일단락 된 이후 삼일공원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1운동 기념 테마 공원’으로 다시 정비 되었다. 총 1억3,000만원을 투입하여 대형 국기게양대[25m], 독립선언서 기념비[3×1.5m]를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산책로 주변으로 무궁화 및 기타수목을 식재하는 등 경관도 개선하였다. 2018년에는 한국여기자협회에서 유관순 열사 상(像)을 건립하였으며,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공원 내 무궁화동산을 조성하고 3·1 운동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회전·퍼즐 안내판 등을 설치하고 인근 남성초등학교 진입로 1백m 길이 공원 옹벽에 3·1운동을 주제로 한 타일벽화를 조성하여 역사가 흐르는 통학로를 만드는 방식으로 재단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