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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는 아들의 마음, 효사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05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웅호

[정의]

조선 세종노한노들나루 근처에 세운 정자.

[효사정의 건립과 명칭 유래]

효사정은 조선 세종 때 판한성부사와 우의정을 역임했던 노한(盧閈)[1376~1443]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한강변에 세운 정자이다. 노한은 1439년(세종 21) 1월 어머니 왕씨가 사망하자, 선영(先塋)이 있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일대에 어머니의 무덤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삼년상을 마치고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속되자, 여막(廬幕) 근처에 집을 짓고 또 집 북쪽의 한강변 언덕에 정자를 세운 뒤 때때로 오르내리며 사모하는 마음을 달랬다 한다. 이 정자가 바로 효사정이다.

효사정을 세운 노한은 교하 노씨 출신이며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증조는 첨의정승(僉議政丞) 노책(盧𩑠)[?~1356], 할아버지는 창성군(昌城君) 노진(盧稹), 아버지는 대호군 노균(盧鈞)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왕수(王琇)의 딸이다. 1356년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단행할 때 증조 노책이 부원세력으로 처형될 만큼 교하 노씨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권문(權門)이자 부원세력 중 하나였다. 공민왕 때 위축됐던 교하 노씨들은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동과 연계되면서 어느 정도 위세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덕분인지 노한은 당시 높은 학문 수준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여흥 민씨 민제(閔霽)[1339~1408]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집안 덕분에 1391년(공양왕 3) 음서로 벼슬길에 오른 노한은 손위 동서였던 이방원(李芳遠)[1367~1422]이 집권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여 좌부승지, 이조전서, 경기도 관찰사, 한성 부윤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409년(태종 9) 처남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가 태종에게 불충한 언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14년간 양주 별장에 은거하다가 1422년(세종 4)이 되어서야 태상왕 태종의 명으로 복관되었다. 복관 이후 형조판서, 판한성부사,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고, 1435년에는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1437년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당시 조선에 와서 많은 폐단을 야기하던 환관 출신의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해서 그들이 올 때마다 접반(接伴)이 되어 폐단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효사(孝思)’라는 정자 이름은 노한 당대 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지은 ‘효사정기(孝思亭記)’를 보면, “공숙(恭肅)의 맏아들 돈녕공(敦寧公)께서는 나의 선군(先君) 대민공(戴慜公)과 동서지간이셨다. 일찍이 함께 정자에서 노닐다가 돈녕공께서 [나의 선군께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청하니 선군께서 ‘효사’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미처 기문을 짓지는 못하셨다”라고 하였다. 「효사정기」에서의 ‘공숙’은 노한의 시호이고, ‘돈녕공’은 노한의 맏아들인 노물재(盧物載)[?~1446]인데,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해서 ‘돈녕공’이라 칭한 것이며, ‘대민’은 강희맹의 아버지 강석덕(姜碩德)[1395-1459]의 시호다. 노물재와 강석덕은 모두 심온(沈溫)[?~1418]의 사위가 되었는데, 심온은 세종(世宗)[1397-1450]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의 아버지이므로, 노물재와 강석덕, 세종은 모두 심온의 사위로서 동서지간이 된다. 이러한 인척 관계로 인해 노물재가 강석덕에게 아버지가 건립한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석덕은 ‘효사’라는 정자 이름은 지었지만 기문을 짓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이에 노물재의 아들 노사신(盧思愼)[1427-1498]이 이종사촌 사이였던 강석덕의 아들 강희맹에게 기문을 요청하자 「효사정기」을 짓게 된 것이다. 즉 강희맹은 아버지가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 수행한 것이다.

‘효사’라는 정자 이름을 지은 강석덕은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齊), 시호는 대민이다. 아버지는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한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다. 태종 초에 음서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면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이던 1416년(태종 16)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하였다. 동서지간이던 세종이 즉위한 후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에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仁壽府) 소윤(少尹)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후 사헌부 집의, 승정원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46년(세종 27) 친누이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제조가 되어 국상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개성부유수와 중추원사를 역임하였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아들 강희안(姜希顏)[1418~1464]·강희맹과 함께 서화로 명성이 높았다.

[유명인사의 효사정 방문과 다양한 시문 제작]

효사정노한의 손자인 노사신(盧思愼)[1427-1498]이 세조 때부터 중앙정계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면서 고위 관원과 유명 인사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노사신은 조정의 주요 인사들을 효사정으로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개최하거나 효사정과 관련한 시를 부탁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노사신 자신이 지은 「효사정」 칠언시뿐 아니라 김수온(金守溫)의 서문, 서거정(徐居正)·이석형(李石亨) 등의 시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사가집(四佳集)』·『저헌집(樗軒集)』·『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하고 있다. 이들 시문을 보면, 효사정이 이곳에 세워지게 된 계기와 함께 교하 노씨 집안의 대를 이은 효성스러운 삶의 모습이 함축적으로 잘 담겨져 있다. 또한 노사신이 유명한 재상이 된 것도 바로 집안 대대로 내려온 효에 바탕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효사정의 존재를 널리 알린 노사신은 자가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아버지는 노물재이고 어머니는 심온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1498년(연산군 4) 사망할 때까지 세조와 성종 등 국왕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성균관·예문관 등의 학문 관련 관직과 도승지·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의 요직, 의정부 삼정승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467년 여진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는 데 공로를 세웠으며, 이듬해 일어난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82년 선성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고, 1488년에는 우의정 겸 영안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국가의 사민(徙民) 정책을 담당했으며, 1498년 무오사화 때에는 사화를 주도한 유자광(柳子光)을 견제하며 사림파의 피해를 줄이는 데 노력하였다. 유학뿐 아니라 불교 등 다른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을 주도하고 불경의 번역에도 참여하는 등 15세기 후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 한강신사 건립]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시키 신타로[志岐信太郞]가 지금의 효사정 일대에 한강신사(漢江神社)를 건립하였다. 이 해에 다이쇼[大正] 천황이 즉위한 것을 기념하는 한편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봄가을 두 차례 제례를 거행할 때에는 원근에서 일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공원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시키 신타로는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쿠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 관련 청부업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시키 신타로는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판매하기 위해 1921년 조선천연빙주식회사와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 이들 회사와 다른 제빙회사를 통합해 조선제빙주식회사를 만든 이후에도 사장에 취임하였다. 즉 시키 신타로는 한강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이 점은 한강신사의 제신(祭神) 중에 고토히라[金刀羅]대신(大神)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식되어 보통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한강신사는 1934년 신메이신사[神明神祠]로 변경되었다. 당시 총독부에 변경을 신청한 대표자는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였는데, 한강신사 설립자인 시키 신타로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쿠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31년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明水臺) 토지 경영 사무소를 차리고 자신만의 이상향을 구축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신메이신사 역시 조선에 있던 다른 신사처럼 광복이 되면서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효사정의 복원과 주변 환경]

1993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한강 남쪽 언덕[141-2번지]에 효사정을 복원하였다. 효사정 오른쪽에는 원불교 소태산기념관[서울회관]과 흑석체육센터가 위치해 있으며, 왼쪽에는 효사정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앞쪽으로는 올림픽대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뒤쪽으로는 한강대교 남단에서 국립 서울 현충원을 거쳐 동작대교 남단에 이르는 현충로가 통과하고 있다. 또한 서울지하철 9호선현충로 아래로 지나가고 있다. 효사정은 이곳에서 바라본 한강 전경이 아름다워 서울의 우수 조망 명소로 선정되었다. 한강대교 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효사정과 함께 ‘효(孝)’를 상징하는 조선시대의 또 다른 정자인 용양봉저정이 위치해 있다.

2018년 6월, 서울특별시 동작구에서 ‘효사정 일대 문학공원 조성 사업’을 완료하고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효사정 바로 아래에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沈熏)[1901-1936]의 문학비와 동상, 안내판을 설치하여 지역 특색을 살린 문학길을 조성하였고, 전망 데크와 산책로를 정비하여 도심 속 쉼터의 모습을 갖췄다. 특히 한강 진입을 위한 연결로를 개설하여 시민들의 이 일대 접근성을 크게 개선하였다. 또한 소나무·산수유·이팝나무·철쭉 등 다양한 수목을 식재하여 한강수변길 자연의 모습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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