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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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舞亭講會韻 |
영어공식명칭 | Bongmujeong Ganghoeu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봉무정강회운」최상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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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49년 - 「봉무정강회운」최상룡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봉무정강회운」간행 |
배경 지역 | 「봉무정강회운」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한시|근체시|칠언율시 |
작가 | 최상룡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최상룡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봉무정에 느낀 감회를 읊은 한시.
[개설]
최상룡(崔象龍)[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봉무정강회운(鳳舞亭講會韻)」은 8행으로 이루어진 칠언율시로, 최상룡의 문집 『봉촌선생문집(鳳村先生文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봉무정강회운」의 전문이다.
천작사암강수심(天作斯巖講樹深)[강론하던 나무 우거진 곳에 하늘이 이 바위를 만드니]/기년공대팔공잠(幾年空對八公岑)[몇 년을 공연히 팔공산과 맞닿아 있었는가]/
정성봉무응래봉(亭成鳳舞應來鳳)[봉황이 춤추는 정자를 만드니 봉황이 날아오고]/수대금호긍철금(水帶琴湖肯撤琴)[물결이 금호를 둘렀으니 기꺼이 거문고를 거두네]/
임하풍류금일사(林下風流今日事)[숲속의 풍류는 오늘날의 일이요]/서중지악고인심(書中至樂古人心)[글 속 지극한 즐거움은 고인의 마음이라]/
치유시벽우단상(緇帷試闢雩壇上)[치유의 숲에서 기우제 지내니]/질질초연제제금(秩秩初筵濟濟襟)[훌륭한 선비들이 질서 있게 자리에 나아가는구나]
[특징]
「봉무정강회운」은 1·2·4·6·8구(句)에 침(侵)계열의운자를 두었다.
[의의와 평가]
「봉무정강회운」은 시선의 이동을 팔공산에서 봉무정을 거쳐 금호로 옮겨 가며 주변 풍광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봉무정에서 문회(文會)[시문 따위를 창작하고 서로 비평하는 문학 모임]가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