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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민운동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169
한자 大邱市民運動會
이칭/별칭 대구시민대운동회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행사/행사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성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작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대구시민운동회 개최
행사 장소 달성공원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 294-3]지도보기

[정의]

일제강점기에 대구광역시에서 개최되었던 체육대회.

[연원 및 개최 경위]

대구시민운동회는 1911년 가을에 개최되었다. 1910년대는 육상, 축구, 야구, 정구 등의 스포츠 인기가 높아지고 더불어 학교체육의 위상도 높아지던 때였다. 이에 교내에서 행하여지던 소규모의 경기가 아닌 다양한 학교들이 참여하는 대운동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당시 민족주의 민간 단체였던 ‘간이회’가 기획하고 ‘강의원’이 주관하여 개최되었다.

[행사 내용]

대구시민운동회는 대구의 공립보통학교인 해성·대남·계성·농림학교 등이 출전하였다. 운동경기는 육상뿐이었는데도 관중들은 꽹과리 등의 농악기를 울리며 목청껏 응원전을 펼치고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대구시민운동회는 비록 육상 단일 종목이기는 하였으나, 50m, 100m, 이어달리기, 장애물경기 등 현대의 경기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질서를 자랑하였다. 당시 대구시민운동회의 개최로 대구는 한바탕 체육 바람이 불었고, 운동 팀이 없는 학교의 학생들도 삼삼오오 모여 나름대로 운동하며 다음에 있을 대회를 준비하였다.

[현황]

대구시민운동회는 일제에 숨죽인 이 땅에 한바탕 스포츠 열풍을 일으킨 근대 육상의 효시였다. 경기를 치를 만한 곳은 전부 일본의 감시 아래 있었고, 수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던 곳은 달성공원뿐이어서 당시 일본은 서성로를 포함한 달성공원을 나다니는 사람들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달성공원에서 열린 대구시민운동회는 미국 선교사들의 참여로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기록하였다. 비록 대회를 주관하였던 민족주의 단체 강의원은 일제의 만행으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고 대구시민운동회도 이어질 수 없었지만, 광복 1주년 기념으로 대구시민운동회는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다시 열린 대구시민운동회는 19만 명의 관중이 참여하여 다시 한번 광복의 기쁨을 나눴으며, 훗날 육상의 메카 대구광역시에서 개최되었던 육상경기로서도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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