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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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復良 |
영어공식명칭 | Heo Bokryang |
이칭/별칭 | 국보(國輔),낙암(洛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충희 |
출생 시기/일시 | 16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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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1년 - 허복량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허복량 병자호란 참전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허복량 훈련원도정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추모 시기/일시 | 1696년 - 허복량 충렬사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812년 - 허복량 병조판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812년 - 허복량 용강서원 배향 |
출생지 | 성서 - 대구광역시 달서구 |
부임|활동지 | 쌍령 -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
사당|배향지 | 용강서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선원로33길 101[이곡동 1343-1]![]() |
성격 | 무관 |
성별 | 남성 |
본관 | 김해(金海) |
대표 관직 | 훈련원도정 |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무관.
허복량(許復良)[1602~1637]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국보(國輔), 호는 낙암(洛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참봉 허수연(許壽連)이고,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직장에 오른 허승립(許承岦)이다. 아버지는 참봉 허운로(許雲老)이고, 어머니는 최윤(崔崙)의 딸 월성최씨(月城崔氏)이다.
허복량(許復良)은 1602년(선조 35) 대구 성서(城西)[현 대구광역시 달서구]에서 태어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사촌형인 허득량(許得良)과 함께 무술을 연마하여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하였다.
허복량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허득량과 함께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광주(廣州) 쌍령(雙嶺)[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때 허복량은 손가락을 끊어 충절을 맹세하고 여러 번 싸워 많은 적군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허복량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훈련원도정을 제수하였다. 1637년 허복량은 선봉장이 되어 많은 적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허복량의 저술로는 문집인 『낙암집(洛庵集)』이 허득량의 문집 『상무헌유고(尙武軒遺稿)』 보유 편에 합쳐져서 전한다.
허복량은 1812년(순조 12) 병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1696년(숙종 22) 허득량과 함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충렬사는 1812년(순조 12) 용강서원(龍岡書院)으로 승격되었다. 용강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8년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