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94
한자 朝鮮勞動共濟會 大邱支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5월 27일 -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발기대회 개최
설립 시기/일시 1920년 6월 5일연표보기 -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창립
개칭 시기/일시 1923년 1월 -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에서 대구노동공제회로 개칭
성격 노농운동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 소속 지회.

[개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朝鮮勞動共濟會 大邱支會)는 1920년 5월 27일 대구 은사관에서 지회 발기대회를 열고, 서만달(徐萬達)·박기돈(朴基敦)·정운해(鄭雲海) 등을 창립 준비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발기대회는 5월 28일에 열렸던 조선노동공제회 평양지회의 발회식보다 하루 빠른 전국 최초의 조선노동공제회 지회 발기대회였다.

1920년 6월 6일 대구역대구좌(大邱座)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창립총회는 중앙 본회의 회장 박중화(朴重華), 총간사 박이규, 의사장 오상근 등 8명이 참석하여 지회의 설립을 축하하였다. 이 자리에서 회장에 박기돈(朴基敦), 이사에 허백(許伯), 서기에 홍순일(洪淳一)·손덕봉(孫德鳳) 등의 임원진이 선출되었고, 800여 원의 의연금이 모였다. 그리고 6월 12일 대구 은사관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임원회’를 개최하고, 중앙본회의 조직 체계와 동일하게 조직 구성을 마쳤다. 이 자리에서 지회 유지비로 855원에 이르는 의연금이 마련되었고, 5월 27일 이래 보름 만에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에 가입한 회원 수가 540여 명에 이르렀다.

[설립 목적]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조선 노동사회의 지식 계발, 일반 노동 상황 조사, 환난 구제 및 직업 소개, 품성 향상, 저축 장려 등 조선노동공제회의 강령을 실현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변천]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1920년 5월 27일 발기대회를 갖고, 1920년 6월 6일 창립총회를 가졌다. 1923년 1월 28일 제4회 정기총회에서 회명을 대구노동공제회로 개정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설립 이후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먼저,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분회 설립 활동을 펼쳤다. 1921년 5월 경주에서 한규석, 김하정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경주분회를 설립하였다.

다음으로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교육과 계몽 활동을 펼쳤다.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교육 활동을 실시하였는데, 교사로는 대구고등보통학교의 한문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대구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상훈이 중심이 되었다. 1922년 4월 노동야학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대중 계몽 활동을 펼쳤는데, 경제사상의 변천[최익준], 생존권의 요구[정운해], 계급투쟁[정운해], 위생 강연 등이 대표적이었다.

중앙 본회의 활동 방향에 맞추어 1922년 2월에 소비조합도 결성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소비조합을 기반으로 하여 노동단체를 결성하였다. 1922년 2월 인쇄직공조합, 토목공려회 등이 결성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1922년 4월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간부를 개선하면서 농업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노동자의 품성 향상, 교육 보급, 내부 충실, 업무 확장 등 노동계급에 관한 일체의 일을 조사 연구할 것을 토의하고 결의하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작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네 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을 선출, 소작인에 관한 관심을 본격화한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노농자·농민이 단결하여 그들의 권리를 신장하고,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근대적인 노동·농민운동과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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