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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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知訥 |
영어공식명칭 | Ji Nul |
이칭/별칭 | 보조국사,목우자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고려시대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에서 활동한 승려.
[개설]
보조국사 지눌의 성은 정씨(鄭氏)이고,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법명은 지눌이고, 시호는 보조국사이다. 지눌은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으로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고,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씨(趙氏)이다.
[활동 사항]
지눌은 8세 때 선종 사굴산파의 종휘(宗暉)에게 출가했다. 이후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배움에 정진하다가 창평 청원사(淸源寺)에 머물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 1182년(명종 12)에 승과에 합격했다. 1185년(명종 15)에는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가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했다. 이때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지눌의 두번째 깨달음이다. 1190년(명종 20)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로 옮겨가 결사(結社)를 실행하였다. 결사의 이름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했다.
지눌은 1190년 팔공산 동화사를 중창하였다. 1197년(명종 27)에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은둔했다. 여기서 오로지 수행에 정진했는데, 어느 날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세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하게 했다. 1200년(신종 3)에는 정혜결사를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옮기고 이후 11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결사운동에 정진했다. 1205년(희종 1)에 길상사가 준공되자 희종은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라는 현판을 내려 이름을 고치게 하고 가사를 하사했으며,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했다. 또 억보산(億寶山) 백운정사(白雲精舍)와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 규봉난야(圭峰蘭若)와 조월암(祖月庵)도 모두 지눌이 개창하여 선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은 곳이다.
[사상과 저술]
지눌은 선과 교를 이론적으로 일치시키고 실천하였다. 결사를 만들어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의 마음을 바로 찾아 바로 닦는 일에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지눌의 사상 핵심은 ‘심즉불(心卽佛)’,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定慧雙修)’, ‘이타행(利他行)’, ‘원융회통(圓融會通)’, ‘수기설법(隨機說法)’ 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저술에는 『권수정혜결사문』 1권, 『수심결(修心訣)』 1권, 『진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1권,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3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1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 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법어가송(法語歌頌)』 1권, 『육조단경발문(六祖壇經跋文)』 1편, 『상당가송(上堂歌頌)』 1권, 『목우자시집(牧牛子詩集)』 1권 등이 있다.
[묘소]
지눌의 부도(浮屠)인 감로탑(甘露塔)은 송광사 설법전의 오른쪽, 지금의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다. 입적 7일 후 다비를 하였는데, 사리를 수습하니 큰 것은 30과이고, 작은 것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지눌의 탑비 비문은 고려시대 문신인 김군수(金君綏)가 1210년(희종 6) 공주지사(公州知事) 재임 당시에 찬한 것이다. 탑비는 3년 뒤 1213년(강종 2)에 건립되고 1678년(숙종 4) 10월에 중건하였다. 감로탑은 그동안 송광사 경내에서 몇 차례 자리가 옮겨졌으나 지금은 원래 위치에 있다. 1926년 해체 복원되면서 입구에 30개 돌계단을 축조하였고, 1927년에 감로탑 개수비(甘露塔改修碑)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지눌은 1210년(희종 6) 음력 3월 27일, 세수 53세, 법랍[세속에서 나이와는 달리 승려가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 46세로 입적하였다. 7일 후 다비를 하여 오색사리 수백 과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희종이 지눌을 국사(國師)로 추증하였으며,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라 하였다. 지눌의 진영은 보물 제1639호로 지정되어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