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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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椿 |
영어공식명칭 | Lee Seungch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29년 - 이승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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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59년 - 이승춘 서울정치대학 3년 수료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 이승춘 통일민주청년동맹 경북도연맹 조직부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7월 11일 - 이승춘 반국가행위죄로징역 1년 6월 선고 |
출생지 | 이승춘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군 길안면 효음동 |
거주|이주지 | 이승춘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2구 921 |
성격 | 사회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통일민주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조직부장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 거주하는 4·19혁명시기 통일민주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회운동가.
[활동 사항]
이승춘은 1961년 3월 대구광역시에서 통일민주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의 결성에 참여하고 조직부장이 되었다. 장면정권이 시민, 학생들의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과 통일운동에 맞서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공포 시행하자 시민, 학생들은 이를 이대악법이라 규정하고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61년 3월 31일 대구시[지금 대구광역시]의 경북정당사회·노동·학생단체 공동으로 이대악법반대 경북정당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단체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4월 2일 교원노조연합회와 함께 대구역 광장까지 가두 시위행진을 한 다음 대구역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1961년 4월 2일 오후 4시 무렵 공동투쟁위원회 주요 간부, 시민 천여 명과 함께 경북노조위원회 사무실 앞에 결집하였다. 이에 학생공동투쟁위원회 소속 학생들이 시내 일원에 “살인법 물리치고 조국통일 이룩하자”, “오라, 역전광장으로” 라는 제목의 전단을 살포하였다. 그날 저녁 횃불시위 대원 십여 명을 선두로 하는 약 일만 명의 시위 군중은 “이대악법 통과되면 4월 혁명 끝판이다”, “백색테러집단 해체하라”라는 구호를 고창하였다. 이 시위는 1961년 9월 23일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시위행위와 소요난동을 일으켜 북한 괴뢰에 이익을 주었다”며 반국가행위죄로 적용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61년 10월 5일자로 대구지방법원에 이송하기로 결정되었다. 1962년 2월 10일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구형받았다. 1962년 7월 11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았다.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정치활동 금지자로 분류되었다가 1963년 12월 「정치활동정화법」로부터 해금 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