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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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海龍 |
영어공식명칭 | U Haeryong |
이칭/별칭 | 우해운(禹海雲),해뢰(海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6년 7월 16일 - 우해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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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67년 3월 9일 - 우해룡 사망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7년 - 우해룡 진우연맹사건으로 징역 3년형 선고 |
묘소 | 우해룡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 71길 33[신암동 산27-1] |
성격 | 무정부주의 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혁조단 결성|대구노동친목회 활동|진우연맹 활동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된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 운동가.
[활동 사항]
우해룡은 1906년 7월 16일 출생하여 1969년 3월 9일에 서거하였다. 1925년 3월 신사상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상단체 혁조단(革造團)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7월 대구노동친목계를 대구노동친목회로 전환하는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 당국의 금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축사는 중지되었다. 이 일에 대해 언론은 대구설화사건이라고 보도하였다. 1925년 9월 30일 대구[지금 대구광역시]에서 무정부주의 원칙 아래 사회문제 연구를 목적으로 결성된 진우연맹(眞友聯盟)에 참여하였다. 1926년 4월 박열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를 통해 일본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맹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리하라 가즈오는 일본과 조선에서 자유를 옹호하고 무정부주의 촉진을 위해서는 파괴·암살 등의 방법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인 1926년 5월 무렵 진우연맹원과 함께 8월 10일을 기해 중국 상하이[上海]에 거주하던 고삼현(高三賢)에게서 폭탄을 입수하여 대구 내 도청, 법원, 우편국, 경찰서 등 식민지배 기구를 폭파하고, 각 관서의 고위자를 암살하며, 대구 최고 번화가인 원정, 본정 등의 각 점포를 파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6년 7월 중순에 대구경찰에 검속되어 구류처분 속에 조사를 받았다. 구류가 끝난 뒤에도 또다시 검속되었다. 당시 박열(朴烈) 사건 연장선상에서 조사를 받아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려 했다는 것으로 범죄 내용이 구성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1927년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묘소]
우해룡은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에 있는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우해룡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1990년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