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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628
한자 蔡伯仁
영어공식명칭 Chae baekin
이칭/별칭 현경(顯卿),북암(北巖)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채백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28년연표보기 - 채백인 사망
출생지 채백인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채백인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성격 효자
성별 남성
본관 인천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 조선 후기 효자.

[가계]

채백인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현경(顯卿), 호는 북암(北巖)이다. 고려 중엽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蔡先茂)의 후손으로, 현조는 조선 중기의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증조는 채선용(蔡先容), 조부는 채익(蔡榏), 부친은 채지영(蔡之瀛), 모친은 밀양박씨로, 박정(朴挺)의 딸이다. 배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기(權機)의 딸이다. 아들 6명을 두었는데, 윤해(允諧), 윤성(允成), 윤승(允升), 윤약(允若), 윤창(允昌), 윤석(允錫)이다.

[활동 사항]

채백인은 1654년(효종 5)에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글을 처음 배울 때 문장의 핵심을 이해하였고, 관례를 치를 나이에 이미 문명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 서적을 깊이 탐독했는데,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임을 깊이 깨닫고 부모님을 모시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을 해칠 정도였다. 채백인은 형과 함께 시묘살이를 했는데, 비바람과 대설에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곡하고 성묘하는 것을 그만둔 적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또 제사 지낼 때 매우 엄숙하게 재계를 했는데, “외모만 재계하고 내면을 재계하지 않는 것은 재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칠 때 『소학』을 강조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도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남과 사귈 때는 온화했고, 남의 선을 보면 마치 자기가 지닌 것처럼 여겨 많은 사람이 존경하였다. 채백인은 일찍이 자신의 집 북쪽에 ‘북암(北巖)’이라는 정자를 지은 뒤에 여기에서 시를 읊으며 한가롭게 지내다가, 1728년(영조 4)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5세였다.

[묘소]

채백인의 묘소는 달성부 북쪽 여봉산(礪峯山)[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있는 산]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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