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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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楙 |
영어공식명칭 | Chae Mu |
이칭/별칭 | 자후(子後),백포(柏浦),귀은자(歸隱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588 - 채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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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채무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채무 증광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채무 연원도 찰방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채무 성균관 전적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70년 - 채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12년 11월 2일 - 채무 소암서원에 제향 |
출생지 | 채무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
거주|이주지 | 채무 이주지 - 강원도 태백시 |
수학지 | 채무 수학지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부임|활동지 | 채무 부임지 - 충청북도 청주시 |
부임|활동지 | 채무 부임지 - 서울특별시 |
사당|배향지 | 소암서원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
성격 | 문무관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인천 |
대표 관직 | 연원도 찰방|성균관 전적 |
[정의]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출신 문무 관인.
[가계]
채무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자후(子後), 호는 백포(柏浦)이다. 부친은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모친은 죽산박씨(竹山朴氏)로, 박배(朴培)의 딸이다. 배우자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김경건(金慶建)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채영걸(蔡瀛傑)·채영길(蔡瀛佶)·채영우(蔡瀛佑)·채영보(蔡瀛俌)·채영임(蔡瀛任)이며, 사위는 금석달(琴碩逹)·김순달(金順逹)이다.
[활동 사항]
채무는 1588년(선조 21)에 대구부 금정리(琴亭里)[현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세 때 조부 채정국(蔡定國)을 모시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낙재 서사원이 주관하는 기암(枝巖) 송정(松亭) 모임에 나아갔다. 이때 서사원의 명으로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암송했다. 14세 때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의 문하에 나아가 『주역』을 배웠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려 했으나 이미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연에 은거할 뜻을 품었다. 곧장 태백산(太白山) 약치곡(弱恥谷)에 들어가서 자연을 사랑하며 생활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연원도 찰방에 부임하여 부당한 제도를 개혁하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48년(인조 26)에 성균관 전적을 지냈으며, 이어서 병조 좌랑이 되었다. 얼마 뒤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경전, 역사서, 시문 등을 즐겨 읽었다. 당시 영남의 석학 수암(修巖) 류진(柳袗)[1582~1635]과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1587~1667] 등과 도의지교를 맺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70년(현종 11)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3세였다.
[학문과 저술]
채무의 문장과 경술은 본말이 모두 갖추어졌고, 특히, 성현의 경전에 담긴 간략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평가를 받는다. 또 출처에 있어서 물러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사람들을 평가할 때 출처에 있어서 으뜸은 백포 채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다. 저서로 『백포집(柏浦集)』이 있다.
[묘소]
채무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해동(解東) 동쪽[현 대구광역시 동구] 송대산(松臺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채무는 사후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11월 2일에 부친과 함께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의 소암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