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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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居正[東區] |
영어공식명칭 | Seo Geojeong |
이칭/별칭 | 자원(子元),강중(剛中),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용석 |
출생 시기/일시 | 1420년 - 서거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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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38년 - 서거정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444년 - 서거정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51년 - 서거정 사재감직장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56년 - 서거정 집현전 박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57년 - 서거정 문과중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60년 - 서거정 문신정시 장원, 공조참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464년 - 서거정 이조참의직과 대제학직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 - 서거정 좌찬성에 오름 |
몰년 시기/일시 | 1488년 - 서거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18년 - 서거정 구암서원 배향 |
출생지 | 서거정 출생지 - 대구광역시 |
묘소|단소 | 서거정 묘소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
사당|배향지 | 서거정 배향지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 79-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대구|달성 |
대표 관직 | 사재감직장|집현전박사|공조참의|대사헌|대제학|이조참의|좌찬성 |
[정의]
조선 전기 대구광역시 동구의 금호강, 동화사 등을 찬탄하여 「대구십영」을 집필한 대구광역시 출신 학자.
[가계]
서거정의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서의(徐義)이며,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딸로, 서거정은 권근의 외손자이다. 이색의 제자로서 고려말 정몽주, 정도전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새 왕조에 공헌한 권근의 외손이라는 점은 서거정의 가계도에서 주목되는 지점이다. 서거정의 개인문집인 『사가집(四佳集)』에 “나의 외조 권근은 도덕과 문장이 백세의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외할아버지 권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서거정은 군사(郡事) 김여회(金如晦)의 딸 선산김씨와 혼인하였으며, 아들로 군수(郡守) 서복경(徐福慶)을 두었다.
[활동 사항]
서거정은 조선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문신이자 학자이다. 서거정은 조수(趙須)와 유방선(柳方善)에게 수학하였다. 서거정은 학문의 식견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뿐만 아니라 풍수(風水)에까지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된다. 집현전박사와 경연사경(經筵司經)을 거쳐 1447년(세종 29)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으며,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세조와는 각별한 인연으로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서거정은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을 역임했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하였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6년 우찬성에 오르고,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1478년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또한 1478년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새로 편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다.
[학문과 저술]
서거정의 문장과 글씨는 당대에 매우 뛰어났다. 그는 45년 동안 세종에서 성종까지 조선의 여섯 왕을 섬겼다. 그 기간 동안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하였다.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의약 등의 학문에 정통하였다. 저서로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가 있으며, 글씨로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가 있다. 개인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있다.
서거정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1466년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참가하였다. 1476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였다. 1485년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했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서거정은 자신의 고향인 대구지역을 대상으로 칠언절구의 한시 「대구십영」을 남겼다. 이는 15세기 당시 대구 풍광을 잘 표현하고 있어 서거정의 빼어난 표현력과 대구의 지리적 특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제1경 「금호강의 뱃놀이」, 제7경 「동화사의 중을 찾음」, 제9경 「팔공산에 쌓인 눈」 등은 대구광역시 동구의 절경을 예찬하고 있다.
[묘소]
서거정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서거정은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구암서원은 원래 167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귀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한 서원으로, 1718년 현재 위치로 이건하면서 서거정 선생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서침과 서거정 외에 서성(徐渻), 서해(徐嶰)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고 있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