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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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新武洞 講舍堂 |
영어공식명칭 | Eosagak Hall at Gangsadang House of Sinmu-dong, Daegu |
이칭/별칭 | 신무동 강당,부인동 강사당,신무동 강사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77길 1[신무동 70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은석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1745년 건립된 강당.
[개설]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조선 후기 대구의 유학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이 1745년(영조 21) 건립한 마을 강당이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에 「부인동동약」을 시행하면서 오계선(五繼善)·배자운(裵自雲)·구선록(具善錄)·김일해(金一海) 등과 함께 의논하여,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恤貧庫)를 만들어 동민의 생활을 먼저 안정시킨 후, 봉무당 강당을 건립하여 동민들의 교육에 힘썼다. 현재도 매년 3월에 부인동 다섯 문중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향사를 지낸다.
한편,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강사당어사각(講舍堂御賜閣)’이라고 소개한 자료가 있는데,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위치]
팔공산순환도로 부인사 입구에서 서쪽 파계사 방향으로 500m쯤 가면 신무교가 나온다. 신무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다리 밑을 통과, 남쪽으로 700m쯤 내려가면 용수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나온다. 바로 이 지점 우측 돌담 아래에 대구 신무동 강사당 안내판이 있고 바로 곁에 있는 붉은색 기와를 얹은 흙돌담장 고가가 부인동 강당이다.
[변천]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1739년(영조 15)에 최흥원에 의해 처음 실시된 부인동동약이 그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선공고·휼빈고 같은 마을 공동 재산을 조성하여 동민들의 생활을 먼저 안정시킨 다음, 1745년(영조 21)에 부인동 강당을 건립하여 동민들을 대상으로 교화사업을 실시한 것이다. 2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인동 다섯 문중 중심의 부인동 강당 모임은 이어지고 있다.
[형태]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정면 4칸·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다. 부인동 강당은 흙돌담을 둘렀고, 정면 처마 아래에 ‘부인동강사(夫仁洞講舍)’ 편액이 걸려 있다.
[현황]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경주최씨 문중을 중심으로 하는 부인동 다섯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조선 시대 향약과 그 성격이 같은 마을공동체의 규약인 동약을 실시하기 위해 건립한 마을 강당이다. 현재까지 학계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부인동동약」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실시된바 있는 향약·동약 중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로 인정을 받고 있다. 따라서 대구 신무동 강사당은 조선 시대 향약 연구 및 지역의 역사·문중·인물·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