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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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野山隊 |
영어공식명칭 | Yasandae |
이칭/별칭 | 빨치산,공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6년 10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유격부대.
[개설]
1946년 10월항쟁 이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팔공산으로 입산한 좌익세력들이 형성한 유격부대[‘빨치산’, ‘공비’]로 ‘구빨치’라 부르기도 하며 빨치산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10월항쟁에 참가하거나 연루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설립 목적]
10월항쟁 이후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검거령으로 인해 합법적 활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 입산해 무장투쟁을 전개할 목적 아래 자발적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1948년 ‘2·7투쟁’을 계기로 남조선노동당에서 무장투쟁이 부분적으로 채택되면서 야산대의 조직이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6·25전쟁 이후 본격적인 유격투쟁[빨치산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야산대는 당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2·7투쟁’ 이후 3·1절 기념투쟁, 5·10선거반대투쟁, 8·28지하서명 투표, 인공기 게양 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현황]
야산대의 한 개 군 규모는 대략 50에서 100명 정도였다. 야산대는 38소총, 장도, 칼 또는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야산대는 당의 무장부대로서 당 조직체계에 따라 조직되었다.
[의의와 평가]
야산대는 대구광역시에서 발생한 10월항쟁 이후 합법적 활동이 크게 축소된 뒤,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에서 전개된 초기 형태의 무장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