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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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熙覺 |
영어공식명칭 | Chae Huiga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8월 2일 - 채희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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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6일 - 채희각 대구 미대동 만세 시위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8일 - 채희각 대구 미대동 2차 만세 시위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7일 - 채희각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67년 10월 6일 - 채희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채희각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미대동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거주|이주지 | 미대동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활동지 | 여봉산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채희각(蔡熙覺)[1894~1967]은 1894년 8월 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6일 인천채씨(仁川蔡氏) 집성촌인 미대동에서 마을 차원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대구 미대동 만세 시위는 채갑원(蔡甲元)이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시위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채학기(蔡鶴基)에게 건네면서 시작되었다. 채학기는 「독립선언서」를 읽고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이후 「독립선언서」와 더불어 자신이 지향하는 바의 독립에 관한 내용을 격문으로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이때 채희각도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채희각은 1919년 4월 26일 늦은 시간 채갑원·채학기·채봉식(蔡奉植) 등과 함께 미대동 여봉산(礪峯山)에 올라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틀 뒤인 4월 28일 다시 여봉산에 올라 채갑원·채학기·채봉식·채경식(蔡敬植)·채명원(蔡命元)·채송대(蔡松大)·권재갑(權再甲) 등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채희각은 팔공주재소(八公駐在所) 소속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대구헌병대로 압송되었고,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채희각은 1967년 10월 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채희각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희각 등을 기리기 위하여 1919년 8월 15일 여봉산에 ‘미대마을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