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71
한자 判官 李侯徵海 永世不忘碑
영어공식명칭 Pangwan Ihujinghae Yeongsebulmangbi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27길 11-4[불로동 21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59년 - 이징해 출생
건립 시기/일시 1706년연표보기 - 판관이후징해 영세불망비 건립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19년 - 이징해 사망
현 소재지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27길 11-4[불로동 210]지도보기
성격 불망비
양식 대석|비신
관련 인물 이징해
재질 화강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50㎝[비신 높이]|46㎝[비신 너비]|23㎝[비신 두께]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있는 조선 후기 대구판관 이징해의 불망비.

[개설]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判官李侯徵海永世不忘碑)는 조선 후기 대구판관(大丘判官)으로서 관내의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힘을 쓴 이징해(李徵海)[1659~1719]의 공덕을 기리고자 1706년(숙종 32) 여름에 세워진 불망비이다.

이징해는 자(字)가 계함(季涵)이고, 본관이 전의(全義)이다. 1681년(숙종 7) 스물세 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음관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1703년(숙종 29) 9월에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1706년 8월까지 3년간 재임하였다. 재임 중인 1704년과 1705년에 흉년이 와서 굶주린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당상관에 올랐다. 또 호랑이를 잡았기 때문에 말을 하사받았다.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웠으나 조정의 명으로 훼철되었다. 1706년(숙종 32) 5월 13일에 어사(御史) 이태좌(李台佐)·유태명(柳泰明) 등은 “대구판관 이징해는 치정(治政)을 잘한 이유로써 가자(加資)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건립 경위]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는 흉년에 백성을 구제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위치]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210에 있다.

[형태]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는 화강석으로 만든 비신(碑身), 대석(臺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높이 150㎝, 너비 46㎝, 두께 23㎝ 규모이다.

[금석문]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에는 ‘판관이후징해영세불망비(判官李侯徵海永世不忘碑)’라는 비제가 새겨져 있고, 비를 세운 시기를 ‘병술(丙戌) 하(夏)’[병술년 여름, 즉 1706년 여름]로 기록하고 있다.

[현황]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는 개인의 집에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판관 이후징해 영세불망비는 흉년을 맞아 굶주림에 허덕이던 관내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힘쓴 판관을 기리는 비석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