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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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馬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34-9[상인동 881-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월촌못 가에 있는 의마비와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의마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월촌못 가에 있는 의마비(義馬碑)와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의마비」는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과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의마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월촌못 안에 있는 비석이다. 의로운 말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의마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대구 지역에 우배선(禹拜善)[1569~1621]이 살았다. 우배선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사성(師聖)이고, 호는 월곡(月谷)이다. 경상도 성주(星州) 화원현(花園縣) 월촌리(月村里)에서 현감(縣監)을 지낸 우봉(禹鳳)의 손자로 태어났다. 우배선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외가인 청도에서 살다가 아홉 살에 고향에 와서 공부하였다. 낙동강 강변에는 조암평야(槽岩平野)가 있었는데, 하안(河岸) 공사가 안 되어서 평소에는 갯벌과 다름없었고 물이 빠지면 허허벌판이 되는 곳이었다. 조암평야에는 야생마가 많았다. 야생마 중 한 마리가 유독 성질이 사나워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우배선을 잘 따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배선은 가재(家財)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우배선은 조암평야의 야생마를 타고 출전하였는데, 말이 총명하여 화살이 날아오면 무릎을 꿇어 우배선을 여러 번 구하였다. 우배선은 낙동강(洛東江)과 금호강(琴湖江), 비슬산(琵瑟山)과 최정산(最頂山)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우배선은 일등공신이 되었지만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우배선이 죽자 말도 먹이를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사흘 만에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의 의로움을 기리며 의마총(義馬塚)을 만들었다. 의마총은 일제강점기 말에 상인지 확장 공사로 수몰되었고, 후에 못가에 의마비를 세웠다.
[모티프 분석]
「의마비」는 주인을 따라 죽은 의로운 말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