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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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利施設 |
이칭/별칭 | 제언,저수지,방보,천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대구 지역에 있던,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각종 시설, 저수지, 제언(堤堰).
[개설]
조선시대 주요 수리시설은 물을 가둘 수 있도록 만든 저수지이며, 제언(堤堰), 방축(防築), 제, 언 등이 해당된다.
[변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년]에 의하면, 대구군에는 4곳의 큰 저수지[대제(大堤)]가 있었다. 군내에는 성당제(聖堂堤)·불상제(佛上堤)[배자못]가 있고, 수성현에는 둔동제(屯洞堤), 해안현에는 부제(釜堤)가 있었다. 성주목 관할 하에 있던 팔거현의 소리제(所里堤)는 대구시 북구 칠곡 지역에 있었다.
오늘날 성당제는 성당못이며, 둔동제는 수성못인데, 확장하기 이전부터 있던 저수지였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년] 제언에는 대구부 내 11곳, 수성현 4곳, 하빈현 4곳, 해안현 3곳 모두 22곳의 수리시설과 관개면적(灌漑面積)을 싣고 있다. 성주목 화원현에는 효성제·범삼제·신제·감물천제·마이제가 실려 있고, 팔거현에는 소이제(所伊堤) 등 7곳이 실려 있다.
300년 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 제언에는 명칭을 28곳의 지(池)[풍각현 4곳 제외]와 12곳의 제(堤)로 구분하였는데, 둘레를 보면 성당지 3,290척, 불상지 4,299척, 마의곡지 4,057척, 둔동제 1,420척, 적지제 487척, 황청동지 405척 등이며, 제언별로 규모가 다르다. 『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에는 제언 84곳[풍각현 5곳 제외]과 방보(防洑) 38곳[풍각현 11곳 제외]이 보인다.
수리시설의 확대 지역을 보면, 대구의 지역개발은 15세기에는 주로 읍치(邑治) 혹은 속현의 옛 치소(治所)가 위치한 평야·구릉지대 위주였다. 조선 중기에는 외곽으로 확산되면서 산간지대의 개발이 추진되었고, 동시에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개발이 고산지대까지 뻗어나가면서 고산지대로의 인구 이동이 본격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대구의 수전(水田)농업은 원래 치소 근처의 평야·구릉지대를 중심으로 한 저수지[제언(堤堰)]의 활발한 축조를 통하여 발달하여 갔다. 그렇지만 하천을 막아 물을 확보하는 천방(川防)[보(洑)] 관개가 활성화한 16세기 이래 수전농업은 직파법(直播法)에서 모내기법으로 전환하였으며, 수전의 중심축 또한 점차 산간지대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중후반 이후 이러한 양상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해발 500m 이상의 고산지대가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개발 추세와 더불어, 천방 관개가 가능한 산간지대에서는 수전농업을 주로 하였고, 저수지 관개에 머물러 있던 평야·구릉지대는 한전(旱田) 농업을 주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의 산간지대는 19세기에 이르러 농업경제 및 문화의 중심 지대로 부상하였고, 하천·평야지대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점차 낙후된 지역으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