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 경차퇴도선생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730
한자 畫巖 敬次退陶先生韻
영어공식명칭 Hwa-arm[Reply To The Hwa-arm Poem Written By Teacher Lee-hwa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71년 - 「화암 경차퇴도선생운」 저자 우하구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48년 - 「화암 경차퇴도선생운」 저자 우하구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971년 - 『백괴집』 간행
배경 지역 화암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지도보기
성격 한시|칠언절구
작가 우하구

[정의]

일제강점기 유학자인 우하구가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화암연경서원을 둘러보고 지은 한시.

[개설]

「화암 경차퇴도선생운(畫巖 敬次退陶先生韻)」의 저자 우하구(禹夏九)[1871~1948]의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자는 영서(永敍)이며, 호는 백괴(百愧)이다. 대구부 월배면 상인리(上仁里)[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우동(禹友東)이고,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서규열(徐奎烈)의 딸이다. 조긍섭(曺兢燮)[1873~1933]과 교유하였다. 평생을 숙독(熟讀)과 가학(家學)에 힘쓰며 공부에 정진하였다. 저서로 『백괴집(百愧集)』이 있다.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광역시에 최초로 지어진 서원이며, 이황(李滉)[1501~1570]·정구(鄭逑)[1543~1620]·정경세(鄭經世)[1563~1633] 세 사람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하였던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북구 연경동의 사이에 있다.

화암산(畵巖山)은 해발고도 110m의 산이며, 지도상에 정식명칭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화암(畵巖)이라는 하식애(河蝕崖)가 있는 산이라 하여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구성]

「화암 경차퇴도선생운」은 칠언절구(七言絕句)이다.

[내용]

공산일맥화암성(公山一脉畵巖成)[팔공산의 한 줄기가 화암을 이루었으니]

입원당년송육경(立院當年誦六經)[서원 세운 그 해부터 육경을 암송하였다네]

삼복유시다감모(三復遺詩多感慕)[남기신 시를 누차 읽으니 감동과 연모 많고]

능령대매황연성(能令大寐恍然醒)[능히 큰 잠든 이들 황홀히 일깨울 만하네]

[특징]

「화암 경차퇴도선생운」이황의 「화암서원(畵巖書院)」에 사용된 ‘청(青)’ 계열의 운목을 사용하여 지은 칠언절구이다.

[의의와 평가]

「화암 경차퇴도선생운」이황이 남긴 「화암서원」에 차운한 작품이고, 시의 분위기가 이황의 시와 매우 흡사하다. 「화암 경차퇴도선생운」을 지을 때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연경서원이 훼철되고 옛 흔적만 남아 있을 때이다. 우하구는 이황의 시를 바탕으로 연경서원의 모습을 상상하며 유학의 가르침이 화암처럼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읊은 것이다. 「화암 경차퇴도선생운」은 평생 가학에 힘썼던 우하구의 삶의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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