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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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答蔡夢硯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Chae-mongyeon |
이칭/별칭 | 「채몽연과의 문답」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답채몽연」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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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답채몽연」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에 「답채몽연」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사수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
배경 지역 |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
배경 지역 | 하남정사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
성격 | 잡저|문답 |
작가 | 정구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채몽연과 나눈 문답.
[개설]
「답채몽연(答蔡夢硯)」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채몽연(蔡夢硯)[1561~1638]의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정응(靜應)이며, 호는 투암(投巖)이다. 대구 금정리(琴亭里)[현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정구의 문인이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으로, 팔공산(八公山) 회맹에 참여하여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의 수성북면장(壽城北面將)을 맡았고, 정유재란[1597]에는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도와 화왕산(火旺山)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로 이거하여 하남정사(河南精舍)를 짓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다. 하남정사는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 『투암집(投巖集)』이 있다.
2001년 발행한 『국역 한강집』에서는 「답채몽연」의 제목을 쉬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채몽연과의 문답」이라고 표기하였다.
[구성]
「답채몽연」은 두 개 항목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답채몽연」은 장례(葬禮)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대한 채몽연의 질문에 정구가 답하는 내용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질문1: 장사를 치를 때 쓰는 검은 비단과 엷은 홍색 비단을 영구(靈柩)의 어느 위치에 두어야 합니까?
답1: 혼란을 야기한 나의 예전 답은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 가문의 격식에서는 검은 비단은 영구의 윗부분 양쪽 가에 두고, 엷은 홍색 비단은 영구의 아랫부분 양쪽 가에 두는 것이라네.
질문2: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서 무엇 때문에 사물에 대응하는 관점으로 나아가 명명(明命)이 밝게 빛난다고 한 것입니까?
답2: 사람들은 보통 움직이면서 실수를 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움직이는 것에 나아가 공부를 하도록 한 것이네.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욕(人慾)을 하늘의 이치로 알고 인욕만을 따를 것이네. 그래서 행동하는 데 깊은 성찰을 하게 하여 인욕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것이네. 그러고 나서야 대응하는 일에 착오가 없어 올바른 하늘의 이치를 얻게 되는 것이라네. 그래서 하늘에서 부여 받은 명명(明命)이 밝게 빛난다는 말을 사물에 대응하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네.
[특징]
「답채몽연」에서 채몽연은 장례 절차와 「숙흥야매잠」의 내용에 있어서 논란이 될 만한 사항에 대하여서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고, 정구는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하게 답을 제시하였다. 정구는 예학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는 절차보다 예(禮)의 본질이 우선임을 알리기 위하여 고정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허용적이며 융통성 있는 답을 제시하였다. 학문 공부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는 단정적이며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여 학습자의 안내를 도왔다. 「답채몽연」이 수록된 『한강집(寒岡集)』의 「답채정응(答蔡靜應)」에도 「숙흥야매잠」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 보인다.
[의의와 평가]
「답채몽연」은 조선 후기 영남 장례 문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고, 다양한 학문에 정통한 정구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하여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대구 지역에서 정구의 학문적 기여도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