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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24
한자 南漢江水運-中心-忠州
영어의미역 Chungju is the Center of the Namhangang River Water Carri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최일성

[개설]

충주는 남한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수로 운송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어 온 지방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세곡을 저장하는 12조창을 설치하였는데 충주에 설치한 조창이 덕흥창이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는 덕흥창 이외에 경원창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세곡을 받아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1465년(세조 11)에는 금천(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 있던 덕흥창과 경원창이 금천의 하류인 가흥(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으로 옮겨져 가흥창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세곡을 저장하였다가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운송하면서 한강은 우리나라 최대의 물길이 되었고, 그 물길의 중심이 충주에 있던 덕흥창·경원창·가흥창이었던 것이다. 15세기에 정비된 관선 조운제는 16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고 17~18세기에는 사선 운송 체계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목계는 1750년 이전에 이미 내륙의 상항(商港)으로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였고, 이로 인해 충주는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후 목계는 한강 수운에 의해 하항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근대적 철도와 자동차가 발달되면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충주를 중심으로 도로와 철도, 자동차 운행이 시작되고 1928년에는 철도가 조치원에서 충주까지 개통되어 육상 교통이 더욱 발달하자 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던 목계는 쇠퇴하고 따라서 충주도 쇠퇴하였다.

[덕흥창의 설치와 남한강 수운]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조세를 받아 보관하다가 중앙으로 수송하기 위해 수로 운송 체계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조운제(漕運制)라 하였다. 그리고 수로 운송을 하기 편리한 바닷가의 고을과 강변에 창고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조창(漕倉)이라 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 남쪽 지방의 해변가나 물가 고을에 12개의 창고를 설치하였다.

즉 충주에 덕흥창(德興倉), 원주에 흥원창(興元倉), 아주(아산)에 하양창(河陽倉), 부성(서산)에 영풍창(永豊倉), 보안(부안)에 안흥창(安興倉), 임피에 진성창(鎭城倉), 나주에 해릉창(海陵倉), 영광에 부용창(芙蓉倉), 영암에 장흥창(長興倉), 승주에 해룡창(海龍倉), 사주(사천)에 통양창(通陽倉), 합포(마산)에 석두창(石頭倉), 서해도 장연현에 안란창(安瀾倉)이 설치되었다. 이들 12개의 창고에는 판관을 두어 부근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 보관하였다가 다음 해 2월부터 세곡을 배로 날랐는데, 가까운 곳에서는 4월까지, 먼 곳에서는 5월까지 수도에 있는 창고로 운반하였다.

1. 고려시대의 덕흥창

덕흥창에는 판관을 두어 충주 부근의 조세를 받아 서울의 창고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운반에 필요한 초공(稍工, 뱃사공), 수수(水手, 선원) 및 잡인(雜人) 등을 두었고, 정종 때는 200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을 두었다. 덕흥창의 업무는 고려 전기부터 1350년(충정왕 2)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왜구가 출몰하면서 대단히 중요해졌다. 고려는 1233년(고종 10)부터 1392년(공양왕 4)에 이르기까지 159년간 왜구의 침입을 받았고, 특히 고려 후기 약 40년간은 왜구의 창궐로 그 피해가 극에 달하였다.

왜구가 고려에 침입했던 목적은 둘로 대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양곡의 약탈이요 또 하나는 인민의 노략이었다. 양곡의 약탈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조운선은 왜구의 약탈 목표가 되었고, 이로 인해 고려의 조운은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1350년(충정왕 2) 4월에 왜선 100여 척이 순천부에 침구하여 남원·구례·영광·장흥의 조운선을 노략질하였고, 1354년(공민왕 3) 4월에는 왜구가 전라도 조운선 40척을 약탈하였으며, 1355년(공민왕 4) 4월에는 왜구가 전라도의 조운선 200여 척을 약탈하였다.

왜구에 의하여 조운선이 약탈당하여 국가 재정의 근간인 조세가 개경에 있는 창고로 수송되지 못하여 관리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자 고려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는 1356년(공민왕 5) 6월에 바다를 이용한 조운 대신 모든 세곡의 수송을 육로로 하고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 원(院)과 관(館)을 세워 육로 운송을 편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부터 바다를 통하여 수송되던 세곡이 육로로 운송되는 육운(陸運)이 시작되었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전라도의 조운도 육운으로 바꿀 것을 청하였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로 인하여 물길이 막히자 조운을 폐지하고 육운을 하였으며, 육운의 원활한 수송을 위하여 전라·양광·경상도와 연해주군의 요역과 부세를 면제해 주었다. 1350년(충정왕 2) 바다를 통한 운송을 폐지하였다가 왜구가 현저히 줄어들어 바다를 통한 수로 운송이 부활되는 1390년(공양왕 2)까지 약 40여 년간 경상도 세곡은 문경·조령을 넘어 충주의 덕흥창에 납부되었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덕흥창은 내륙을 관류하는 한강의 물길을 통하여 경상도 및 충청도 지방의 세곡을 경창으로 수송하여 국가 재정의 중추적 조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로써 충주는 남한강 수로 운송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2. 조선시대의 덕흥창

조선시대에도 조운은 대단히 중시되었다. 새 도읍을 정할 때도 조운의 편부와 노정(路程)의 험난 그리고 성곽을 축조할 지세를 더불어 살피게 하였다. 1393년(태조 2)에는 바다를 통한 운송이 일부 이루어지지만 한강을 이용한 수로 운송이 여전히 중시되어 1394년(태조 4)에 수로전운소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을 두고 용산강으로부터 충주의 연천(淵遷)[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까지 7개 소에 소(所)를 두고 각각 30호씩 예속시켰다. 이로써 충주 연천에 있던 덕흥창에서 용산강 변에 있던 경창까지 한강의 물길을 새롭게 보강했다. 1393년 재개된 바다를 통한 운송도 1394년(태조 4) 8월 충청도 조운선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후에는 육로 운송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1403년(태종 3) 6월 조정에서는 경상도 세곡을 육로 운송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바다를 통한 운송으로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경상도 하도의 조운은 4만여 석이었는데, 때때로 풍랑으로 배가 파손되고 사람이 죽고 또 매년 선군(船軍)이 일번은 조운으로 상경하고 나머지 일번은 방어하게 되니 농사철을 잃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경상도의 19만 5천여 결의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충주 금천에 있는 덕흥창에 수납하게 하고, 금천에서 조운선과 사선(私船)으로 하여금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경창으로 수송하게 하였다.

[경원창의 설치와 경상도 세곡의 보관]

조선 전기에는 경상도 지방의 세곡을 덕흥창에 전부 저장할 수가 없게 되어 새로운 창고가 필요해졌다. 1411년(태종 11) 국가 비축에도 여유가 있고 서울 양 강(서울 용산강과 마포강)에는 빈 창고가 없어 경상도 군자를 둘 곳이 없자, 충주의 강변에 창고를 짓고 경상도민을 인부로 차출하여 충주 금천에 200여 칸의 창고를 만들었는데, 이를 경원창이라 하였다. 경원창은 주로 경상도에서 세금으로 받아들인 곡식을 보관하였다.

1404년(태종 4)에 경상도 세곡이 육운을 이용하게 되고 김해·창원·밀양·양산·함안·초계·창녕·칠원·진해·의령 지방은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게 되어 농민이 직접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운송에 필요한 값을 지불하였으니 이를 삼가지세(三價之稅)라 하였다. 즉 선가(船價)·인가(人價)·마가(馬價)를 말한다. 사람과 배를 모집하여 선가와 인가를 지급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상주에 이르고 육로인 문경·조령을 넘을 때 인가와 마가를 지불하여 충주의 경원창에 납부하였다. 삼가지세는 전세와 동일한 액수가 되어 근방 사람들이 삼가지세의 이익을 얻고자 서로 다투어 세곡을 실어다가 경원창으로 운반하였다.

낙동강 수로와 조령로는 세곡 수송에만 이용된 것은 아니다. 왜객인(倭客人)도 이 길을 이용하여 서울을 왕래할 만큼 경상도에서 충주에 이르는 육로는 더욱 번성하였다. 경원창에 보관된 곡식은 완급을 보아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서울의 창고로 수송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충주는 조령을 통하여 경상도와 통하고, 한강의 물길을 통하여 서울로 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육로와 수로의 중요한 거점 도시가 되었다.

경원창에는 콩(8,776석)과 쌀(5,000석), 보리, 소금 등이 보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의 세곡을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개경에 있는 경창으로 조전하였고, 조선 전기에는 덕흥창과 경원창이 역시 서울에 있는 경창으로 수송되었으니, 특히 한강의 수운을 이용한 충주의 조창은 2월에서 4월까지 조운하게 되지만 이 기간 내에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얕으면 조전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농사철과 백성이 굶주릴 때는 피하여 조전하였다.

한강을 이용한 수로 운송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있어야 했다. 고려 때는 덕흥창에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 20척이 있어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전라도 영산창(榮山倉)이 53척, 법성포창(法聖浦倉)이 39척, 덕성창(德城倉)이 63척, 경기좌도 조운선 51척이 있는데 경기좌도 조운선은 한강 상류 수운, 즉 강원도의 2개 조창과 가흥창에 소속된 조운선이므로 이들 조운선으로 수송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사수감(司水監)을 두고 세곡을 나르는 일을 감독하고 사선(私船)에 세가(稅價)를 지급하여 사용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는 조운선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문종 때는 병선도 조운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선과 병선의 사용은 많지 않았고 원칙적으로 관선이 사용되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 사선과 병선을 사용하였다. 관청의 배가 넉넉지 못하면 민간의 배를 빌려서라도 시기에 맞추어 수송하고 규정에 의거하여 선세(船稅)를 주게 하였다. 조운선이 부족하여 세조 때는 새로 조운선 100척을 만들어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여러 포의 선군(船軍)에게 많고 적은 것을 짐작하여 나누어 주었다.

조전에서 조운선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공 3명 이상, 수수·잡인 5명 이상을 두어 운영했으나 조선 전기에는 사공(沙工)·격인(格人, 격군) 등을 물길에 익숙한 사람으로 뽑아 운반하게 하고 각 도의 병선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단종 때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처치사(處置使), 첨절제사(僉節制使)와 여러 포의 만호(萬戶), 천호(千戶)는 병선을 거느리고 각각 그 지경에서 조선을 호송하게 히였고, 여울 암초의 장애가 있는 곳에는 표를 세우게 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사선이 파선되어 미곡이 소모된 것이 800여 석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주에서 한강의 수로를 따라 조전된 조운선의 파선이나 인명의 손실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점을 감안할 때, 해운보다 강운이 더 안전하고 편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흥창 설치와 남한강 수운의 활성화]

덕흥창은 지금의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소일마을에 있었고, 조선 전기에 설치된 경원창은 이보다 남쪽인 창동리 금정마을에 있었다. 1461년(세조 7) 4월 경원창에 화재가 발생했고, 또한 목계와 가흥 사이 강에 막흐레기[莫喜樂灘]란 여울이 있어 배가 왕래하기가 위험하여 1465년(세조 11) 하류에 위치한 가흥으로 조창을 옮기고 가흥창이라 하였다.

1. 가흥창의 전세 수납 범위

가흥창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수납한다고 규정하였으나, 아산의 공세곶창(貢稅串倉)도 충청도의 전세를 수납하였으므로 가흥창은 충청도의 충주·음성·괴산·청안·보은·단양·영춘·제천·황간·영동·청풍·연풍·청산 등 13개 고을의 전세를 수납하였다. 또 경상도의 경우 가흥창의 전신인 경원창은 경상도의 부 1개 소, 대도호부 1개 소, 목 3개 소, 도호부 6개 소, 군 15개 소, 현 40개 소 등 총 66개 소의 경상도 지방 전세를 수납하였고, 경상도에 전세를 수납 받는 지역의 조창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경국대전』이 편찬될 당시에는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 가흥창에 납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부터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시기까지는 대략 경상도 전 지역과 충청도 동북의 13개 고을이 가흥창의 전세를 수납하는 범위로, 조선 전기 9개 조창 중에서 전세 수납 범위가 가장 넓은 조창이었다.

『경국대전』 편찬 후에도 가흥창의 전세 수납 범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비록 1470년(성종 1)에 경기도 여주에 이포창(梨浦倉)을 설치하여 청안·진천의 전세를 거두고, 또 우만창(宇萬倉)을 만들어 청산·보은·옥천·황간·영동·음성 등 6개 고을의 전세를 거두었다 하나, 1477년(성종 8)에 청안 등 8개 읍이 다시 가흥창에 전세를 납부하였다. 1443년(세종 25) 이후 경상도 전세 중 일부는 왜료(倭料)를 주었다고 하지만 경상도 전세의 거의 전부가 가흥창에 납부되었다.

1520년(중종 15) 가흥창에 창고를 지을 때 충청감사 이세응(李世應)과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이 상의하여 짓고 있으며, 또 경상도 전세를 가흥창에 납부하는 데 10여 일이 소요된다는 기록에서 경상도 전세의 대부분이 가흥창에 납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20년 당시 약 317,506결의 전결에서 내는 조세가 약 84,970석으로 전국 조세 부담액의 26.1%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가흥창이 가장 많은 조세 수납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흥창의 전세 수납 범위는 인조 때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624년(인조 2) 영남 7읍의 전세가 포(布)로 바뀌고, 1640년(인조 18) 호서의 9읍과 영남의 22읍의 전세가 포로 바뀌었다. 또한 1749년(영조 25) 영서 7읍인 안동·예천·비안·용궁·상주·문경·함창의 전세를 돈으로 환산하여 받도록 하고, 1755년(영조 31)에는 예안·봉화·풍기·영천(지금 영주)·순흥의 전세를 돈으로 받도록 함으로써 가흥창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1760년(영조 36) 창원에 마산창(馬山倉), 진주에 가산창(駕山倉)을 설치하고, 1765년(영조 41)에는 밀양에 삼랑창(三浪倉)을 설치하여 경상도 20읍의 전세를 이곳에서 수납하도록 했으며, 또한 대동미가 대동전으로 바뀌고 경상도의 대동전이 육로로 서울로 운송됨으로써 가흥창의 전세 수납 범위는 좁아졌다. 정조 이후에는 호서 6읍인 충주·음성·진천·연풍·청안·괴산의 세곡만 받아들여 조선 전기에 비하여 전세 수납 범위가 대폭 축소되었다. 1867년(고종 4) 이후에는 가흥창 소속 4개 군인 충주·음성·청안·괴산의 전세와 대동미만 운반하였다.

충주의 가흥창에 수납된 세곡은 원주의 흥원창, 여주의 백애촌, 천녕의 이포, 양근의 대탄사포(大灘蛇浦)를 지나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두미진(斗迷津)·미음진(渼音津)·광나루·송파·동재기를 지나는 260리의 수로를 따라 용산에 있는 경창으로 수송했다. 세곡을 수송하려면 배와 배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였고, 또 풍랑과 파도 등 일기도 잘 살펴야 했으며, 수운의 경우는 강수의 수량도 중요한 문제였다.

2. 가흥창의 조운선

가흥창에 수납된 세곡을 경창으로 수송하기 위해서는 조운선이 필요하였다. 조운선의 수는 경기좌도 51척, 경기우도 20척만으로 기록되어 있어 가흥창에 배당된 참선의 수는 알 수 없다. 경기좌도에 속하는 조창은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 충주의 가흥창이므로 경기좌도의 51척은 한강의 3조창 소속의 수참선이다. 그러므로 『경국대전』 편찬 시 경기좌도의 참선은 51척이었고, 1463년(세조 8) 경기좌도의 참선은 80척이었다. 1755년(영조 31) 예안·봉화·풍기·영천(영주)·순흥의 전세를 돈으로 받도록 함으로써 80척이던 참선은 1808년경에는 16척으로 줄어 들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좌수참 충주 가흥창 수참선 15척이라 기록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가흥창 참선이 14척, 1892년(고종 29)에는 가흥창의 참선이 15척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을 감안 할 때, 가흥창의 참선은 시대가 지나면서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에 경상도와 충청도의 전세를 수송할 때는 그 양이 많아 참선의 척수도 80여 척에 이르렀으나, 그 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전세가 면포와 돈으로 환산되어 조세를 받고 경상도의 새로운 조창인 마산창과 삼랑창 등이 설치되어 가흥창의 수세 지역이 좁아지는 데서 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3. 가흥창의 관원

가흥창에 전세를 수납하고 이를 보관하고 배를 이용하여 서울로 무사히 수송하기 위해서는 이를 관리하는 관원이 필요했다. 조선 전기에는 수운판관을 두었고, 세조 때는 수참전운판관(水站轉運判官)을, 성종 때 다시 수운판관을 두었으나 수운판관이 그 임무를 소홀히 하고 탐오하여 부정하고 조졸들을 등쳐먹고 삼도를 왕래하며 역기(驛騎)를 번거롭게 하는 폐단이 있다 하여 1779년(정조 3) 수운판관을 없앴다. 수운판관을 없앤 후 충주목사가 도차사원(都差使員)이 되어 업무를 수행하고 조운에 관한 일은 음성·진천·연풍·청안·괴산의 수령들이 차사원(差使員)이 되어 돌아가면서 사무를 담당하였다.

4. 가흥역가흥리

조선시대에 가흥에는 가흥역이 있어 역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가흥은 번창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420년(세종 2) 인녕부소윤(仁寧府少尹) 송희경(宋希璟)이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갈 때 가흥역을 지나면서 지은 시를 보면 “허술한 세 집이 산모퉁이 옆에 있어, 이름은 가흥인데 흥하지 아니했네.”라고 읊었으니 세종 당시의 가흥은 쓸쓸한 역촌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65년(세조 11)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 있던 덕흥창과 경원창이 가흥리로 옮겨오고, 경상도와 충청도 세곡이 가흥창에 납부되고, 이를 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서울로 수송하면서 가흥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사신이 일본으로 가고 올 때나 일본 사신이 왕래할 때 육로나 수로를 이용하면서 가흥역을 경유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가흥리는 더욱 번창하였을 것이다. 1760년(영조 36)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방리조에 가흥면을 보면, 편호(編戶) 444호, 남 1,057명, 여 1,176명, 계 2,233명이 살고 있는 큰 동리인 것으로 나타난다. 20년 후인 1780년(정조 4) 편찬된 『충청도읍지』충주목 방리조에 가흥면을 보면, 편호(編戶) 400호, 남 1,102명, 여 1,166명 계 2,268명으로 기록되었으니 이때까지는 가흥이 큰 촌으로 유지되었다.

정약용이 1797년 4월 15일 조그마한 배를 타고 가흥을 지나면서 지은 시에 “참선은 대숲처럼 빽빽이 떠 있고, 백회칠한 담장은 띠처럼 둘러 있고, 검청색 기와는 용마루에 보이는데……”라고 읊었으니 당시만 해도 가흥창 앞 한강에는 배가 빽빽이 떠 있었고 가흥에는 기와집에 백회칠한 담장이 둘러쳐진 집들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편찬된 『호서읍지』에서 가흥면을 보면 상동리·중동리·하동리의 3개 리에 편호 230호, 남 314명, 여 247명, 계 561명이 기록되어 1,701명이 줄어들어 무려 75%의 인구가 감소되었다. 가흥의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가흥창과 관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항(河港)으로서 목계]

목계가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기는 1636년(인조 14)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고 오면서 쓴 『해사록(海槎錄)』에서이다. “인조 14년 8월 12일 한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12척), 8월 17일 원주에 머물렀다. 19일 고개를 넘어 목계(木溪)의 지평(持平) 조공숙(趙公淑)의 집에 닿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전후를 살펴보아 여기에 기록된 목계는 지금의 목계(牧溪)와 동일한 지명임이 틀림없다.

위 기록에서 김세렴 일행은 12척의 배를 타고 원주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아마 한강 변의 흥원창으로 보이며, 여기서 대현(큰 고개의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지만)을 넘어 구래촌을 경유하여 목계지평 조숙공의 집에 당도, 당일로 충주까지 갔다.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가 역이 있는 가흥을 경유하지 않고 목계를 경유했다면 목계에도 가흥과 같이 통신사와 그 일행이 쉴 수 있거나 식사를 제공할 만한 편의 시설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게 본다면 이미 목계는 한강 변에 위치하여 중앙까지 알려진 일반 촌락과는 다른 촌락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해 본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여 온 나라의 상고들은 대체로 말[馬]의 등에 화물을 싣고 다녔다. 그러므로 길이 멀면 운반비 때문에 이득이 적으므로 물화를 옮겨가고 바꾸어 이득을 보는 데는 화물과 재산을 배에 싣고 운반하는 것만 못하였다. 배로 왕래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서로 통하는 곳에서 이익을 주관하고 외상 거래도 하였다. 낙동강에는 김해의 칠성포, 나주의 영산포, 금강의 강경, 전주의 사탄, 한강의 동남방에 청풍의 황강, 충주의 금천과 목계, 원주의 흥원창, 여주의 백애, 춘천의 우두와 낭천의 원암, 연천의 징파도가 상선들이 거래하는 곳이다.

15세기에 정비된 관선 조운제는 16세기에 동요하고, 17~18세기에는 사선 운송 체계가 운송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선들은 운임을 받고 세곡을 운송했다. 이들은 어채(魚采)나 선상 활동에서 더 나아가 농장의 소작료나 정부의 세곡을 운송하면서 운송 역량을 증대시켰고 활동 범위도 넓혀갔다. 게다가 17세기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전국적으로 농산물의 물량이 증대되고 이를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운송해야 했다. 양반지주의 소작료뿐만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물량도 증대되었다.

공납(貢納)이 대동법으로 개혁되면서 막대한 대동미가 운송되어야 했고, 이와 같은 운송 물량의 증대는 운송업자의 활동을 자극하여 사선인(私船人)들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대동미의 운송은 선운업자들의 활동을 촉진시켰다. 대동미는 전세보다 그 액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운송을 위해 정부가 특별히 운송 체계를 마련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운송은 지토선(地土船) 또는 경강선(京江船)이 맡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전세곡(田稅穀)은 6도 269읍 중 136읍이, 대동미는 5도 245읍 중 113읍이 사선을 임차하여 운송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주로 조창 부근의 사람들을 조선의 선인으로 고용하였고, 사선도 조창 주변의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충청도는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여 사대부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고, 서울의 세가(世家)들은 충청도에 농토와 집을 두어 이곳을 근거지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풍속이 서울에 가까워서 서울과 그리 다름이 없는 까닭에 가장 골라 살 만한 곳이었다. 충청도 중에서 서울과 가장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 한강이 흐르는 충주 일대였다. 서울의 세가들이 충주 일대에 농토와 집을 마련하고 이들의 소작료가 상당한 물량을 형성하여 운송되었을 것이다. 이에 물량을 운송할 배도 증가하여 1702년(숙종 28)에는 200석 내지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경강선이 300여 척이나 되었고 그들이 받는 운임은 1,000여 석이 되었다.

1. 목계의 번성

이러한 여건 속에서 가흥창 부근에 물량을 수송하기 위한 배는 점차 증가하였지만,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은 장소는 그리 넓지 못하였다. 가흥에서 가장 가깝고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고 제천과 원주, 충주로 통하는 길목인 목계 일대에 배를 정박하게 되고, 특히 사선이 목계에 정박하여 상행위를 하게 되자 1750년대 내륙의 상항(商港)으로서 가흥은 기타 강촌(江村)보다 번창하였다. 『택리지』에 “한양의 여러 강촌은 앞산이 너무 가까우며, 충주는 금천과 목계 외의 나머지 강촌은 다 쓸쓸한 촌락이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경에는 서울 인구가 20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서울의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경강상인 등의 새로운 사상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이 상업의 자유를 요구하게 되자 정부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하였고, 이후 상인들은 도고 상업을 통해 상업 자본을 축적해갔다. 경강상인들은 축적된 상업 자본을 이용하여 여객주인업과 선운업, 선상 활동을 겸하게 되었고 경강포구(京江浦口)는 전국적인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무렵 한강은 많은 배가 왕래하였다. 1797년 4월에 정약용이 경기도 양근 부근을 배로 지나면서 지은 시에 “술파는 배가 날듯이 달리어라. 처음에는 인정으로 술을 권하여, 전혀 돈을 따지지 않는 것 같네”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가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이들 배를 상대로 술을 파는 배도 생겨났던 것이다.

도고는 직접 생산자나 소상인들이 생산지에서 상품을 서울로 반입하는 길목에 터를 잡고 대량으로 매점하고, 지방에서 도고를 하는 여각·객주·선주인 등이 매점한 상품을 다시 도고하였기 때문에 한강 중류에 있는 목계는 그들의 활동 무대로 더욱 활발해졌다. 경강상인들은 곡물과 어염 등을 배에 싣고 전국의 포구 및 내륙 강변을 찾아 상업 활동을 전개하여 점차 자본력이 커져 도고상업을 하고, 선상 활동은 대체로 음력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연중무휴로 활동하였는데, 생활필수품 전 품목을 가지고 한강 상류와 하류의 물산을 교역시켜 양 지역의 생산 활동을 촉진하였다.

목계는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동해의 생선 및 산간의 화물이 대개 이곳에 모여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는 『택리지』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동해안, 강원도 산간 지역, 충청도 지역의 물산과 서해의 어염이 목계에 모여 교환되었다. 한강에는 영월·영춘·단양·북진(청풍)·서창·탄금대·목계·흥호·흔암·우만·여주·이포·하시포리·양근·우천 등 많은 나루가 있고 이곳에도 경강상인들의 활동은 전개되었는데, 유독 목계가 그 중심이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첫째, 조선시대 한강에서 강선의 가항 구간은 강화도 하구에서 강원도 영월 맏밭나루까지였다. 목계는 서울 용산에서 수운이 가능한 영월까지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모일 수 있는 지점이다. 둘째, 목계는 가흥의 인근에 있으며 배가 정박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셋째, 한강을 항행하는 모든 배는 목계까지 운행이 가능했다.

충주에서 하류 100㎞는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고 잔잔하며, 충주에서 영월 사이 120㎞의 강안은 대체로 깊은 협곡을 이루고 여울이 많아 7월과 8월 고수위가 아니면 큰 배가 항행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충주에서 영월까지는 대체로 소선이 통행하였다. 충주에서 달천을 이용하는 뱃길은 금천(현 중앙탑면 창동리)에서 괴진(槐津)까지 36㎞는 50석을 싣는 소선이 다녔다.

한강을 이용하는 배는 대선(길이 50척 이상, 폭 10척 3촌 이상, 250석 적재), 중선(길이 46척 이상, 폭 9척 이상, 200석 적재), 소선(길이 41척 이상, 폭 8척 이상, 130석 적재)이 있는데, 선박이 단독으로 항행할 수 있는 구간은 원주의 흥호나루(흥원창)까지이다. 여기서 충주까지는 3척 이상, 그 상류로는 5척 이상이 선단을 조직해 함께 여울을 헤치고 뱃골을 파내면서 거슬러 올라갔다. 고려 때 충주 금천에 있던 덕흥창에 평저선으로 200석을 실어 날랐다는 사실, 그리고 목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여 목계까지 250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왕래했음을 알 수 있다.

목계는 1900년대 초까지 충주 지역의 상업 중심지였다. 이는 1909년 목계장이 충주 지역의 시장 중에서 거래 금액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1909년 충주를 중심으로 한강을 왕래한 선수는 영춘 65척, 단양 71척, 청풍 441척, 충주 250척으로 계 827척이다. 1913년 내국통운주식회사 소유 선박 돛단배[日鮮形帆船] 8척이 충주-용산(서울) 간 화물을 수송했는데, 배는 50석, 40석, 30석, 25석을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목계에서는 한강을 통하여 산간 내륙 지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소금과 해산물, 새우젓과 일용잡화 등을 싣고 올라와 공급하고 대신 곡물과 목재 등을 서울로 운송하였다. 1930년대에 목계로 들어온 물품은 광목·비단·포목·고무신·소금·건어물류, 어물류(조기·새우젓·굴젓·명태·청어·고등어)·양잿물 등이며, 나가는 물품은 쌀·콩·조·옥수수·감자·참깨 등 곡물류와 무·배추·참외·수박 등 채소류이다. 또한 오대산을 낀 평창과 영월·정선 등지의 목재는 뗏목을 만들어 한강에 띄워 서울로 운송했다.

2. 목계의 쇠퇴

목계는 한강 수운을 통해 하항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 근대적 철도와 자동차가 발달되면서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목계는 쇠퇴할 조짐이 일어났다. 첫째, 조선시대 목계가 중심이 되었던 목계-용산 간의 뱃길은 1913년 내국통신주식회사가 8척의 선박으로 용산에서 충주의 탄금대 구간으로 화물 수송을 개시함으로써 용산서 충주까지 종착점이 목계가 아닌 탄금대로 바뀌었다.

둘째, 1900년대 충주를 중심으로 육상 교통이 발달하였다. 육상 교통의 발달은 도로와 철도, 자동차 운행이 좌우한다. 1913년부터 1933년까지는 사통오달 각 지역으로 도로가 뻗어나가고, 1913년 충주에 자동차가 들어온 이후 1932년에는 충주를 중심으로 뱃길이 닿는 한강 상류의 영월·평창·영춘·단양과 서울, 충청도의 전 지역, 경상도의 문경·상주·대구·영주(영덕), 경기도의 장호원·이천 지역에 자동차가 왕래하면서 물자를 수송하였다. 더욱이 1928년 철도가 조치원에서 충주까지 개통되어 육상 교통은 더욱 발달하였다.

3. 목계가 남긴 문화유산

목계가 번창하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목계별신제이다. 목계별신제는 남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동제로서 충주 지역 마을 문화의 대표성을 띠고 있다. 목계별신제는 시장 관계자들이 시장 번영책의 하나로 3년·5년·10년 만에 한 번씩 3일 내지 7일간 벌이던 향토 축제로서, 남한강 유역의 교역 중심지가 만들어낸 최고의 장시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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