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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읍 만세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46
한자 淸道邑萬歲運動
이칭/별칭 대성면 유창리 만세 운동(大城面 楡湖里 萬歲 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연표보기 - 청도읍 만세 운동 발생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청도읍 만세 운동 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
성격 독립운동|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보곤|서정기|조경윤|김타관|정술문|김타관|정술문

[정의]

1919년 3월 14일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에서 계획된 만세 시위운동.

[개설]

3·1 운동 당시 경상북도 청도군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모두 7회의 크고 작은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관공서 습격, 일본 경찰 구타, 일본인과의 충돌, 자위회 공격 등 점차 격렬한 무력시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서는 1914년 3월 14일에 만세 운동을 계획했으나 일제의 경계가 심해 실패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청도군 지역에서는 일찍이 일제의 근대적 민족의식을 갖춘 청년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고, 나아가 농민 및 노동자 계층이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경과]

청도군 대성면[지금의 청도읍] 내호리에서 매약업(賣藥業)을 하던 장로교회 조사 김보곤(金寶坤)은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3월 2일에 평양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황주(黃州)에서 평양 신학교 생도 이승길(李承吉)을 만나 평양에서 목사 길 모(吉某)가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는 통지에 따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홍종필(洪鍾弼)로부터 경성 지방에서도 똑같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청도로 돌아왔다.

3월 13일 김보곤은 동네 서당과 자택에서 서정기(徐正基), 조경윤(趙景潤) 등에게 서울을 비롯한 서북 지방의 만세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김타관(金他寬), 정술문(鄭述文)으로 하여금 3월 14일 유천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학생과 청년들을 모아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도록 권유하였다.

또 김타관, 정술문을 시켜 밀양 공립 보통 학교 생도들에게 만세 운동 참가 통지장(通知狀)을 발송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보곤은 태극기 24매를 제작하여 서정기, 조경윤, 김타관, 김술문 등에게 나눠 주었다.

[결과]

3월 14일 유천 시장에서 계획하였던 만세 시위는 일제 경찰의 경계가 엄중하여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말았고, 김보곤 등의 주동자 모두가 검거되었다. 보안법 제7조에 의거 김보곤 징역 1년, 서정기, 조경윤, 김타관, 정술문 등은 각각 징역 6월이 언도되었고, 그 후 김타관, 정술문은 형의 집행이 유예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 청도읍 만세 시위운동은 서울이나 평안도 등 각처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전개되었다. 비록 준비 단계에서 실패하고 말았지만, 인접하고 있는 밀양 지역의 밀양 보통 학교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에 동참하자는 통지장을 발송했던 점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참고문헌]
  • 「김보곤 외 4인 판결」(대구 복심 법원 형사 제1부, 1919. 5. 1.)
  • 「김보곤 외 4인 판결」(고등 법원 형사부, 1919. 6. 19.)
  • 「김보곤 외 2인 판결서」(고등 법원 형사부, 1919. 6. 19.)
  • 권대웅 외, 『청도의 독립운동사』(청도군, 2010)
  • 권대웅, 「청도군 운문면의 3·1 독립운동」(『서암 조항래 교수 회갑 기념 한국사학 논총』, 아세아 문화사, 1992)
  • 권대웅, 「청도군의 3·1 독립운동」(『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 54, 한국 민족 운동 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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