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9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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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和聖堂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충장로 319[경화동 10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인균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에 있는 천주교 마산교구 소속 성당.
[변천]
1910년경 원다두는 당시 안민에 살고 있던 가음정 교회 개신교 신자였던 현용범에게 개종을 권유하였다. 현용범이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안민리에서 첫 신자가 된 이래 김순남[마리아]도 입교했으며, 진해에 천주교의 전교의 계기를 만들게 한 최금동[현 죄순이[시몬의 아버지]의 어머니 김은금[수산나]도 신자가 됨으로써 차츰 신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 후 공소의 필요성이 생기자 최금동[바오로]이 자신의 대지를 제공하여 안민 공소가 건립되었다. 그 후 1930년 4월 진해시 충무동 6가 28에 충무동 공소가 들어서게 된다.
공소가 세워지면서 신자들이 부쩍 늘었는데 1931년에는 장로교의 장로였던 배정원이 개종하여 신자가 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2년 엄청난 태풍이 불어 공소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지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충무동 공소를 재건하려 애를 썼지만 관청에서 허가하지 않았다. 충무동 일대에는 일본인들만 살게 하고 조선인들은 경화 지역으로 몰아내려고 했던 것이 일본인들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허가가 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신자들이 경화동의 개인 주택 두 채를 매입하여 집을 헐고 공소 건물을 다시 지었다. 공소 대지는 모두 298㎡[90평]으로 신자들이 모금하여 매입한 것이었다.
이것이 경화 공소의 출발인데 1934년의 일이었다. 그 후 경화 공소는 지금의 중앙 성당이 세워질 때까지 30년 이상을 진해 지역의 유일한 공소로 남아 있었다. 8·15 해방되기 전 일본의 침략 수탈이 심해지고 신사 참배 강요로 인한 신앙의 자유도 억압 되면서 경화 공소 뿐만 아니라 진해 공소도 마찬가지여서 해방이 되고 미군 군종 신부가 오기까지 활동이 부진했던 것 같다. 옛 경화 공소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화 1가동 735와 664로 나주어져 개인 주택이 들어서 있고 공소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공소 건물 없이 지내오다가 1953년 현 경화 본당 유치원 자리에 일제 강점기 금융 조합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당시 해군 공창장 장호근 대령의 부인 조태남[교우]의 개인 소유로서 병원으로 사용해오다가 영업을 중지하고 부산 지방으로 이사함에 따라 이를 매입하게 됨으로써 비로서 완전한 공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3월 새로 매입된 공소 건물에서 장병보[베드로 중앙 성당 2대 주임] 신부님의 집전으로 첫 미사가 봉헌 되었는데 공소 초대 회장은 조위상[원선시오]이었다. 본당이 설립되기 전까지 경화 공소에 중앙 성당 3대 주임신부인 신상조[스테파노] 신부가 주일 미사를 3년간 봉헌했으며 그 후 공군 사관학교 강대형 신부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현재의 유치원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거주하면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다가 해군 군종 신부였던 김상목[다미아노, 대구] 신부가 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1956년 현재의 성당 터는 밭을 두 차례에 걸쳐 매입하고 1965년 5월 현재의 사제관 자리에 있던 일본의 금융 조합 관사를 3차로 매입하였다. 그런데 그 땅을 살 때 현재의 유치원 놀이터가 등기에 누락되었다. 그래서 1984년 교육관 건물 신축 때 농협중앙회에 법정 소송을 제기하여 7개월 만에 승소 판결을 받음으로써 경화 성당 땅으로 등기 되었다. 현재 경화 본당의 총 대지 1,984㎡[600평]을 확보하기까지 경화 본당 초대 회장인 이종립[비오] 회장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며 법정 소송을 담당한 감기용[마르티노] 회장의 노고도 컸다.
중앙 성당 7대 주임 정삼규[요한] 신부는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됨에 따라 경화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당시 부산 교구장인 최재선[요한] 주교에게 본당 승격을 건의하였고 최 주교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 본당 신부가 거처할 집이 있어야 하는데 중앙 본당이나 경화 공소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걱정하다가 최재선 주교에게 사제관 건립에 따른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당시 부산 대청동 중앙 본당 주임인 장병화 부주교에게 간곡히 청하여 당시 7만원을 얻어오는 한편 신자들의 희생적인 헌금으로 경화 성당 사제관을 매입하게 되었다.
드디어 1965년 12월 27일 부산 교구 최재선 주교는 경화 본당 승격을 허락하고 정식으로 중앙 성당에서 분리하여 경화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본당 주임으로 박주선[안토니오] 신부가 서품과 동시에 첫 본당 주임신부로서 사목을 하게 되었고 관할구역은 경화동과 동부 지역[이동, 석동, 덕산, 자은, 풍호, 행암, 장천, 웅천 공소, 웅동 공소, 용원 공소]으로 하였다.
1967년 박주선 신부는 신자들의 뜻을 모아 새 성전 건립을 계획하고 준비해 오다가 1968년 본격적인 성전 건립 실천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68년 4월 7일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초대 마산 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주교의 축복과 함께 성전건립의 첫 삽을 뜨고 정초석을 놓았다. 그해 9월이 새 성전 건립을 마치고 11월 19일 마산 교구 2대 교구장 장병화[요셉] 주교의 집전으로 경화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1969년 첫 본당 신부로 성전을 봉헌하고 본당의 기틀을 마련한 박주선[안토니오] 신부가 떠나고 5월 2대 본당 신부로 허정식[마태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1971년 11월에 허정식 신부가 떠나고 3대 본당 신부로 장덕범[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1973년 6월에 서울 교구로 떠날 때까지 이렇다 할 변천은 없었지만 예비 신자 교리반이 꾸준히 열리면서 1969년에 신영세자가 106명, 1970년에 75명, 1971년에 90명, 1972년에 59명, 1973년에 73명의 신영 세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신자들의 기본적인 선교 활동은 계속 되었다.
1973년 12월 제4대 본당 주임으로 김해동[요한 금구] 신부가 12월에 서품되면서 경화 본당에 부임했다. 약 3~4년간 경화 본당이 별다른 진전 없이 현상유지 상태에서 지내 오다가 김해동 신부의 부임과 더불어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0년 11월 말 본당 화해와 쇄신 봉사팀은 옛날 수녀원과 유치원을 헐고 강당 건립을 착공하고 81년 3월 25일 유치원 84평과 수녀원 30평을 완공하고 장 병화 주교를 모시고 준공식을 가졌다. 수녀원과 강당 건립은 본당 신자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1979년 1월에 6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유영봉 신부는 경화본당 재임 중 마산교구에서 최초라 할 수 있는 반기도회를 조직하여 매월 1회씩 각 반에서 교우 가정에 모여 반기도회를 실시하였다. 또한 1981년부터는 사목 방침을 신자 재교육의 해로 정하고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1회씩 화해와 쇄신을 위한 신자 재교육을 구역별로 실시하여 레지오 단원 교육을 받지 않은 신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교육하였다.
1981년 7월 5일 당시 마산 꼬미씨움으로부터 9개 쁘레시디움으로 이루어진 경화꾸리아를 승인받게 되었다.
1982년 1월 제7대 본당 주임 허성규[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의 증가와 레지오 마리애의 쁘레시디움 확장으로 인한 회합실과 100명 정도의 신자들이 모여 회의나 교육을 휘한 행사장이 없음을 판단하고 교육회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1982년 말 교육관 건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모금 운동은 물론 오스트리아 그라쯔교구 안드리치 본당이 자매결연 관계로 교육관 건립에 미화 4,000달러[한화 약 500만 원]를 보내와 큰 보탬이 되었다. 1983년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2월 19일에 장 병화 주교님을 모시고 성대한 준공식을 가졌다. 교육관을 2층으로 완공하고 연건평 77평에 작은 회합실 5개와 강당 겸용 대회의실 1개가 완공된 것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주일 새벽 미사, 교중 미사, 저녁 미사가 있다. 평일에는 화요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에 수요일, 금요일 오전 10시에 미사가 있다. 토요일 오후 4시에 어린이 미사가 있고, 저녁 6시 30분에 청년 미사 겸 특전 미사가 있다.
주일 오전 9시 30분,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목요일 저녁 8시에 예비신자 교리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비 신자 입교식은 연 1회 이상 실시하고 있다. 정기 미사 이외에도 한 달에 한번 소공동체 모임과 매주 목요일 노인 대학[은빛여정-성경 공부 및 그룹 작업] 활동과 성경 통독반 운영으로 교인들의 신심을 이끌어주고 있다.
울뜨레아, M.E, 성모회, 피스회, 선종회, 성가대, 은빛 성가대, 하상바오로회, 발렌티노회, 자모회, 초등부 자모회, 중·고등부 자모회, 연령회, 군종 후원회, 빈첸시오, 해외 선교 후원회, 성소 후원회 등의 신심 단체와 후원회들이 각각의 설립 목적에 따라 모임과 활동을 하고 있다.
매달 각 소공동체반 모임을 약 150세대가 참여하고 있으며 신자 간의 어려움이나 건의 사항을 나누고, 관할 지역을 위한 복지 사업과 봉사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현황]
2013년 6월 초 현재 주임 신부 1명, 전교 수녀 2명, 유치원 수녀 1명, 사목회장 1명, 사무장 1명이다. 교인 수는 2,672명이며 세대 수는 총 1,113세대이다. 주요 건물로는 단층 성당 건물과 사무실 및 교육관, 주방을 포함한 2층 건물이 있으며, 사제관과 2층에 회합실, 유치원 건물과 2층에 수녀원을 포함한 4개 건물이 있다. 관할 지역은 태백동, 경화동, 병암동, 이동, 석동 일부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