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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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植民時期鎭海地域-民族敎育-開通-啓光學校中心-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수현 |
[일제의 사립학교 규칙과 웅천, 웅동 지역의 사립학교]
일제의 무단 통치가 자행되던 1915년 3월에 사립학교 규칙이 대폭 개정되어 발표된다. 이 규칙의 내용은 사립학교 설치는 반드시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인가 없이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규칙은 당시 사립학교 사정으로 매우 가혹한 처사였고, 그 적용 범위는 한국인을 교육하는 모든 사립학교에 적용되었다.
학교의 경영자가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 이 규칙을 적용받아야 했으며, 한국인의 사립학교에도 일본인 교원을 다수 배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과 과정, 교원 자격에도 더욱 많은 제한을 가하였다. 심지어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에서는 종전에 실시해 오던 종교 과목과 의식 예배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사립학교의 신설을 억제하고 기설 사립학교를 정비하는 한편 교육 내용의 일본 식민화, 한국인의 교육 기회 봉쇄를 위한 조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이 고장에는 많은 사립학교들이 세워서 일제에 항거하는 교육 활동을 하였다. 국권 강탈 전에 설립된 개통 학교·숙명 의숙·경명 학교 등이 운영되고 있었고, 새로이 계광 학교·대정 학교·문성 학원·삼계 학원 등이 세워졌다. 이들 중에는 뒤에 공립학교로 개편되거나 폐쇄된 학교들도 있으나 일제 강점기 사립학교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3·1 운동 후 민족적 의지는 교육으로 더욱 승화되어 정규 사립학교 설립은 못하여도 거의 마을마다 독지가와 동민들에 의하여 야학교나 강습소를 세워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를 교육하였다.
1929년 1월15일자 『동아 일보』에 실린 당시의 교육 기관 중 이 고장 관계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진해면 봉산 강습소 : 웅천면 웅천 여자 야학교
진해면 대정 야학교 : 웅천면 제덕리 노동 야학교
웅천면 신덕 야학교 : 웅천면 사도리 노동 야학교
웅천면 석리 야학교 : 웅천면 서중리 야학교
웅천면 경화동 야학교 : 웅천면 북부리 야학교
웅천면 경화동 불교 야학교 : 웅천면 남문리 야학교
웅천면 수도 강습소 : 웅동면 용원 야학교
웅천면 연도 강습소 : 천가면 대항 야학교
이처럼 진해 지역에는 다양한 학교들이 존재하였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지닌 교육의 요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일제 항거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학교였던 성내동의 사립 개통 학교와 마천동의 사립 계광 학교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개통 학교의 설립과 활동]
진해 지역의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사립학교 설립은 웅천에 개통 학교(開通學校)와 덕산동에 경명 학교(慶明學校)가 효시를 이룬다.
아버지가 웅천현의 관리였던 주기효(朱基孝)[1867~1941]는 자연히 경향(京鄕)을 오르내리는 관리와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개항 이후 외세의 영향과 그에 각성하는 민족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장도 이에 뒤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서울에서 구국의 길로 사립학교를 세워 후진을 길러 세계 기운(氣運)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민족적 의지를 본 그는 내 고장에도 근대적 민족 교육 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이 재원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어업과 염업을 시작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학교를 경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주기효는 36세인 1902년(광무 6) 판임 주사(判任主事)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임하고 오로지 학교 설립의 준비를 서둘렀다. 당시 조선은 청일 전쟁 후 새로이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일제는 이어 러일 전쟁으로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마저 몰아내고 식민지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면서 주기효는 민족의 비운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이미 설립된 서울의 사립학교와 선각자들을 역방하고 돌아와서 1906년 3월 10일 계획하였던 웅천 사립 개통 학교(熊川私立開通學校)를 설립하여 북부동의 사저에서 개교했다. 이 해 10월 5일에 교실이 협소하여 성내동에 있었던 옛 웅천현 서기청 건물로 옮겼다. 뒤에 웅천현 객사를 교사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가정 경제 사정으로 입학하지 못하는 아동이 많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 그리고 남녀 공학의 기피 등으로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고민 끝에 가난한 아동을 위해서 하교 시에 염전에 쓰는 나무를 한 짐씩 주는 방법도 썼고, 유풍(儒風)에 젖어 현대 교육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가정에도 계도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재학생 노호길[1900~1992]은 다음과 같이 추억담을 들려주었다.
“학교에서 상투를 끊고 그것을 들고 집에 오니 모친께서 통곡을 하시더군. 결국 개통 학교를 졸업 못하고 서당에 한문을 공부하러 갔지.”
이러한 일을 바탕으로 고민한 결과 당시로서 남녀 공학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 해에 여성 교육 기관으로 숙명 의숙(淑明義塾)을 설립하고, 북부동에 있던 양사재를 교사로 하여 개교하였다.
두 학교는 건물을 달리 하였으나 한 설립자의 학교여서 행사를 같이 할 때가 많았다. 운동회는 개통 학교에서, 주산 경기 대회 같은 것은 숙명 의숙에서 개최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교원들은 서울·평양·부산 등지에서 초빙해 왔으며, 정주 오산 중학교와는 그 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많았던 관계로 교류도 있었고, 졸업생들이 많이 재직하였다. 한때 우리나라의 문학의 거목인 이광수·최남선 등도 교편을 잡은 적이 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던 학교였다.
학제는 예비과 1년, 초등과 4년, 고등과 2년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즉 오늘의 유치원과 비슷한 예비과에서 1년을 수학하고, 초등과에 진급하여 4년을 이수하면 2년제의 고등과로 진학하였다. 숙명 의숙에는 여학생들의 장기 교육을 바라는 이가 없어서 고등과는 없었다.
주기효는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도서원’도 차려서 무료로 면민들에게 도서를 빌려 주어 향토인의 교양 양성에도 이바지하였고, 졸업생 가운데 유망한 사람 45명을 뽑아서 장차 유능한 교원으로 확보해 두려고 유학까지 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자본주의적 침략 수법으로 한국 정부에 짊어지게 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국채 보상 단연 동맹(國債報償斷煙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민족 실업의 진흥으로 민족의 저력을 기르고자 실업 조합(實業組合)과 흥업 조합(興業組合)을 발기하기도 하였다.
국권 피탈 후 사립학교 탄압으로 학교 경영이 어렵게 되어 1914년 학교를 상인으로 구성된 ‘웅천 상무 조합’에 위양하였다. 이즈음의 일제의 탄압이란 민족 교육을 막기 위해 사립학교들의 공립학교로 편입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단호히 거절한 주기준(朱基俊) 교감은 일본 시학[현 도교육위 장학사 격]에게 폭행까지 당했다. 이렇게 폭행을 당하면서까지 공립학교로의 개편을 반대하였으나, 경화동에 대정 학교, 마천동에 계광 학교 등 사립 민족 학교가 잇달아 설립되니 초조해진 일제는 학교 폐쇄의 위협까지 하였다. 이런 위협에 어린이들의 배움터를 잃게 될까 염려 되어 결국 경영진이 물러나고 1917년 4월 1일부터 개통 학교와 숙명 의숙을 통합하여 ‘웅천 공립 보통학교’로 편입시켰다. 이것이 우리 고장의 최초의 공립학교로 편입이었다. 공립 보통학교로 편입되자 학제를 고등과를 폐지하여 4년제로 단축하였다가 주민의 강경한 요구로 1923년 4월 1일부터 6년제로 연장되었다.
공립 보통학교가 되기 전 사립학교로 운영하던 동안 교기가 있었고, 다음과 같은 교가도 있어서 재학생들은 교기를 바라보며 교가를 힘차게 불러 이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개통 학교 교가〉
[작사 이광수/ 작곡 미상]
곰메의 바위 밑으로 맑은 샘물 솟아나네
내도 되고 늪도 되며 구름 이러 비도 부어
[후렴] 가라 가라 아 아 내 샘 어린 아기 우짖는다.
곰메의 바위 밑으로 맑은 샘물 솟아나네
별과 같은 빛을 받고 옥과 꽃의 정기 녹여
곰메의 바위 밑으로 밝은 샘물 솟아나네
목마른 억조 창생 골고롭게 마시어라
[북부동 이찬상 구전]
[계광 학교의 설립과 활동]
웅동 1동[당시 웅동면] 두동리는 배(裵)씨의 집단촌으로 국권이 강탈되기 이전부터 ‘금동재(錦東齊)’란 서당이 있어서 후손들에게 유학 교육을 하고 있었다. 국권 피탈 후에 민족적 의분을 참지 못하는 지사들이 지방을 유세하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교남(嶠南) 교육 위원 남형주(南亨柱) 등이 시국 강연을 열어 감명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전근대적인 유학보다 근대적 학문의 교육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금동재의 운영자 배익태(裵翊台)는 우선 금동재를 새 학문의 교육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학교로서 면모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1912년 5월 12일 이병두·문석윤 등 유지들이 회동하여 학숙의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총무로 배익태를 선임하였다. 선임된 총무는 두 사람과 의논하여 백광 김창세[웅천 출신으로 오산 중학을 졸업한 민족 교육의 선각자]를 초대 교장으로 초빙하여 창동 학숙(昌東學塾)으로 이해 10월 20일 개교하였다[뒤에 계광 학교로 개칭이 된 뒤에도 이 날을 개교기념일로 함].
새로운 학문을 닦겠다는 학동은 날로 많아지고, 면민의 호응도 커서 금동재의 옛 서당 건물로서는 수용할 수 없어서 이 해에 초가 3간을 신축하여 ‘웅동 면민 회관’으로 겸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인가 학원으로서 탄압이 있었고, 아울러 재정난까지 겹쳐서 사립학교령에 따라 인가를 받기 어려웠다. 이에 굴하지 않고 1914년에 호주인 선교사 맹호은(Rew. F. Macrae)[선교 기간 1910~1940년]을 설립자로 하여 교명을 계광 학교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맹 선교사의 지원으로 마천동의 뒷산인 마봉산 기슭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비록 초가 건물이었으나, 배움에 대한 학생들의 열의가 대단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자 5개의 교실로도 협소하여 소성재(少誠齋)[인천 이씨 재실]를 빌어 수업을 했고, 책걸상이 모자라 자리를 펴고, 칠판이 모자라 벽을 칠판 대신 쓰면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교원들은 스승이면서 민족 지사여서 개천절이 되면 공공연하게 기념식을 올릴 수가 없어서 성흥사[굴암산 중복에 있는 고찰]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기도를 드리고 애국가를 부르며 기념식을 올렸고, 학교는 평소와 같이 수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수업 시간에 맞추어 종소리를 내며 위장을 했다. 졸업생 정일천은 “애국가를 부를 땐 독립이 되는 것 같은 감명에 젖었지.”하며 당시를 회고하였다.
이렇게 민족 의식을 고취하던 계광 학교의 학습 지도는 학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을에 학습방을 만들어서 학교에서 새벽에 치는 종소리를 신호로 학생들은 일어나서 냇가에 모여 세수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습방의 감독은 상급생이 맡고, 선생들은 순회 지도를 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인들을 위해서는 야간부를 두었다. 이러한 교육은 실로 꺼질 듯이 위태로웠던 조국을 구국하기 위한 교육이었고, 민족의 혼을 깨우고 불어넣는 교육이었다.
졸업생 정일천은 배재황 선생을 회고하여 “선생님께서는 ‘프랑스 사람들은 식민지인 월남에서 월남 사람들이 하늘도 못 보게 하고 있단다.’ 하시면서 차양용 월남 모자를 두고 우리나라 사정과 비유를 잘 했지.”라고 하였다.
일본 경찰은 한국 역사나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하지 않나 살피러 곧잘 순시를 왔다. 그럴 때에는 교과서를 기지 있게 숨겨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일제가 우리말을 탄압하던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의 얼을 위한 교육을 하였던 것이다. 졸업생 황필남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마봉산 기슭에서 마천동을 내려다보면 경관이 오는 것이 잘 보여서 일본 경관의 모습이 나타나면 국어나 국사 교과서를 치마 밑에 숨겨서 창문을 넘어 뒷산에 올라 가 소나무 밑에 숨겨 놓고 내려와서 태연하게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수업을 하곤 했지.”
이러한 애국 애족 교육을 하던 계광 학교의 주기용·배재황·신자균·허전 등 교사는 3·1 운동을 할 때는 웅동 지방 만세 시위의 주동이 되었다. 실로 솔선하여 애국 애족의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3·1 운동의 주동이 된 교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피신하여 한 동안 수업이 어려웠고, 학교는 일경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심하여졌다. 일제는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 사학인 계광 학교를 눈엣가시로 여겨 공립 보통학교로 편입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날로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으나 그에 굴하지 않고 1921년 12월 2일에는 소성재에서 고등과 설립 기성회 임원 회의를 열어 면민의 부담으로 고등과 설립과 현 웅동 초등학교 자리로 확장 이전할 것을 의결하였다.
고등과 설치는 면민의 호응이 좋았으며 타 지역에서도 협찬이 있어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많은 회사로부터 기금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건축비에 다 충당될 수 없어서 웅동 수원지의 관리인으로 있던 일본인 나카하라에게 일부를 빌려 다음해 6월 한 동을 지었다.
4년제 보통과에 2년제의 고등과가 증설되자 웅천의 개통 학교가 4년제 공립 보통학교로 편입되고, 진해의 대정 학교가 4년제 공립 고통학교로 편입된 뒤여서 그곳에서 진학해 오는 학생도 많이 있어서 번창 일로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돈을 빌려 쓴 것이 큰 화근이 되고 말았다. 공립학교로 편입을 반대하는 계광 학교의 폐쇄를 노리는 간접적인 압력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채권자 나카하라의 채무 독촉은 성화같았다. 그렇다고 재무 상태가 취약했던 웅동 면민들에게 더 부담을 시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경영자를 바꾸면 완화되는 길이 있을까 싶어 1923년에는 감창세 교장이 물러나고 당시 경상남도 평의원이었던 배익하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경영을 일임하였다.
경영자를 바꾸어 운영하던 계광 학교에 어려운 시련이 또 닥쳤다. 누구보다 민족 운동에 열정적이었던 계광 학교의 교사들이 3·1 운동 때 웅동 지역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주기용은 투옥되고, 배재황·허전·신자균 등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후임으로 조원갑·조맹규·조맹임·서도명 등이 부임하였는데, 이들 역시 민족 운동을 하고 있는 지사들이었다.
1930년 국치일을 맞이하여 웅천의 박정환·김민배·서도인, 용원의 최해도·이준도 등과 같이 항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리거나 붙인 바 있는 조원갑·조맹규 두 교사가 구속되었다. 이에 9월 21일 새벽에 또 다시 용원의 시장 여러 곳에 격문이 붙여졌다. 이 격문은 “진해만에 입항한 일본 제1함대는 우리 한국 민족을 위협하는 시위 행동에 지나지 않으니 우리는 이에 겁내지 말 것."이라는 등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계광 학교 조정호·조명진 두 교사와 두동의 배익봉·주재형[창원 청년 동맹 웅동 지부 위원] 등 4명이 진해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4명의 교사가 진해 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교사 부족으로 부득이 휴학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민족 교육 사학으로서 주목을 하고 있던 당국은 창원군 서무 주임을 보내어 휴교 명령을 내리고 ‘유자격 교사를 고빙하지 아니하면 개교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지시하였다. 이 휴교 명령은 사실상의 폐교 지시였다. 실로 계광 학교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 것이었다. 유자격 교사의 초빙은 어렵고, 채권자의 독촉은 성화같았다. 부득이하게 신축 건물을 진해 장학회에 매도하고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고 말았다.
학교 건물을 잃게 되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웅천 공립 고통학교·진해 공립 보통학교, 멀리는 김해군 진영 등지까지 전학을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아동들은 소사동에 강습소를 차려 조두홍·이두상 두 교사가 지도를 하다가 뒤에 웅동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어 편입시켰다.
이리하여 계광 학교는 그 맥을 다하였지만, 이는 후에 사립 웅동 중학교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계광 학교의 애국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었던 웅동 4·3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919년 4월 3일 소사 수원지 고갯길은 군중들의 독립 만세 함성이 메아리치면서 군중의 흰 옷자락과 태극기로 넘쳐났다. 당시 마천동 소재 계광 학교에서는 민족 사상이 투철한 교사 배재황·허전·주기용·신자균 등이 학생들에게 나라 잃은 슬픔과 독립의 긴급함을 강조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고, 4월 3일 200여 명의 가량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 선언서 낭독 및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계광 학교 교원과 재학생·유학생들로 면밀히 준비되어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마천리 냇가에 모여 주기용의 독립 선언서 낭독과 함께 소사면 사무소를 거쳐 수원지 쪽에서 고개를 넘어 웅천으로 들어가면서 전개되었다. 시위 군중은 웅천에 들어서면서 더욱 늘어났고 웅천 헌병 분견대와 면사무소가 있는 성내동 중심 거리로 들어가 웅천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서 헌병들은 칼과 총으로 진압을 나섰고 맨주먹의 시위대는 무너지고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위 진압을 위하여 투입된 진해 헌병의 기마병들이 총을 쏘며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리밭에 쓰러지는 군중을 비롯하여 잡혀 끌려간 자가 무려 32명이나 되었다.
애국 애족의 정신을 보여준 계광 학교는 유학생들 주최로 여름 방학 때는 경남 축구 대회를 개최하여 김해 합성 학교, 마산 창신 학교, 진해 대정 학교, 웅천 개통 학교와 친선 경기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의 배재황 교사가 작사한 교가, 경치가, 개교기념일 노래도 있었다.
〈계광 학교 교가〉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 우리 임주
반도를 긍휼하고 광명한 빛 주사
세웠네 한 학교 계광 학교
[2절 이하는 기억하는 이가 없었음]
〈계광 학교 경치가〉
어두운 밤을 밝히려는 아침 태양은
머금고 토하는 듯 마봉산 밑에
청아하게 울려 오는 가락 소리는
만민의 왕 메시아를 찬양함이라.
현관 앞에 달린 종이 욺을 따라서
동서문에 떼를 지어 나오는 아침
가슴속에 가득한 것 사랑 두 자요
밖으로 드러난 것 면강이로다.
두 팔을 어깨에 서로 곁고서
소곤소곤 귀에 대고 말하는 모양
상긋상긋 정의 향기 입에서 나고
상긋방긋 웃는 얼굴 눈에서 난다.
[나오는 말]
조선 왕조의 폐쇄 사회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1876]을 계기로 여러 선진 국가와 점차로 수호 통상 조약을 맺게 되어 자연히 외국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구한말은 교육 전쟁의 시기이기도 했다. 항일 인사의 대다수는 학교 설립의 경험이 있었다.
근대 사조의 도입에 따라 교육 제도도 새로워질 수밖에 없어서 1883년에 함경도에 원산학사가 민족 사립학교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져 현대 교육을 하게 되었다. 1885년에는 서울에 배재 학당, 다음 해에 이화 학당이 세워졌다. 이때는 일제가 경제적 침략을 시작하였고, 내정 간섭으로 침략의 독수를 뻗치기 시작하여 애국지사들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교육의 힘으로 중흥을 이루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다.
진해 지역에 민족 사학이 설립된 것은 러일 전쟁이 일제의 승리로 끝나 강화 조약에서 미·일의 밀약으로 한국 침략의 길을 얻고, 1905년에 도만이들에 일제 해군이 들어와 측량을 하다가 쫓겨간 다음 해였다. 이렇게 하여 성내동에 사립 개통 학교와 숙명 의숙, 마천동의 사립 계광 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주권을 빼앗기고 민족이 일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시련을 겪자 진해 지역의 선구자들은 가장 현명한 투쟁 방식으로 배움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방방곡곡에는 구식 서당이 있어서 그들의 자녀 교육에 이바지하곤 했으나, 이 교육이 신시대에 맞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에 이 고장 웅천군의 판임 주사로 근무하던 주기효는 경향을 오르내리면서 교육을 구국의 길로 삼고 현대 교육 기관을 세우게 되었다. 관직을 그만 두고 사재를 들여 웅천 지역에 사립학교를 세운 것이다. 1906년 3월 10일에 세운 이 학교가 바로 개통 학교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웅천 지역의 학생들이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정신을 키워갈 수 있었다.
또한 한 학교가 더 있었으니 이는 바로 계광 학교이다. 당시 교육이 신시대에 맞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우산은 창동숙[마천과 내곡의 경계지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에서, 문석윤이 소성숙[두동에 위치]에서 신교육을 도입하고 나아가 통합하여 현대식 학교를 신축하고 4년제의 초등과와 2년제의 고등과를 병설하였다. 여성 교육을 위하여서는 초등과에 여자부를 병설하기도 했다. 이것이 3·1 운동 1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에게 교육을 베풀지 않았으므로 선교사 맹호은의 이름을 빌려 설립자로 내세웠고 이로써 계광 학교를 발족시킨 것이었다. 계광 학교는 초대에 김창세 교장이, 2대에는 배익하 교장이었으며, 평북의 오산 학교와 인연이 있어 역대 교직원 중에 오산 학교 출신이 많았다. 오산 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하였으며, 이광수도 교편을 잡을 정도로 명망 있는 학교였다. 계광 학교와 오산 학교의 인연으로 당대 문학의 거두 이광수도 이곳을 찾았으며, 명사들도 많이 내왕했다고 한다. 또한 진해 방면 등 멀리서도 학생들이 찾아올 정도로 일제 강점기 명문 사학으로 그 입지를 굳혀가는 계광 학교였다.
계광 학교의 업적은 매우 많겠지만, 가장 큰 치적으로 보자면 1919년 웅동 4·3 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구 웅천 지구[웅천·웅동·진해] 및 김해 지구의 문화의 중심은 계광으로 모이고 독립운동의 핵심도 계광 학교였다. 이때의 교장이 배익하, 교직원은 주기용·허전·임창문·이경학·박남정·배재황이었다. 이들은 독립 만세를 불렀고 또 투옥이 되었으며 망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계광 학교는 민족과 함께 수난을 당하였지만, 이 지역 사회에 정신적 유산인 계광 정신을 남겨놓는다. 계광 정신은 ‘문화적·민족적 선구자의 투쟁 정신’으로 정리할 수 있고, 이 전통을 사립 웅동 중학교에서 계승하여 이 고장에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윤강회라는 것이 있었다. 이 인근에 일제의 인가를 받은 사립학교로 경명 학교·개통 학교·가일 학교·보성 학교·대정 학교·합성 학교·창신 학교가 있었고 이들은 서로 호응하였다. 특히 웅천 지구 학교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윤번제로 학생들의 강연회 등을 열어서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민족 정신 고취와 학술 연마에 결사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계광 학교는 뿌리 깊은 계광 정신을 바탕으로 개천절이 되면 숨어서 식을 올리고 학생들에게 3·1 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아이들에게 떡 봉지를 돌려 사랑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웅천에 있던 개통 학교와 계광 학교는 일제 강점기 지역 교육에 이바지하였으며, 꺼져가던 애국 애족 정신에 불을 다시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진해 지역은 군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일제가 헌병과 경찰을 많이 배치하고 있었고, 한국인 보조 헌병이나 경관들이 주민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감시를 하고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민족주의 교육을 담당하면 계광 학교에서 외세의 지배를 거부하는 민족 의식과 조국 독립을 위해 고통과 고난을 주저하지 않는 구국의 신념으로 일으킨 웅동 4·3 만세 운동은 더욱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정신이 일회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웅동 중학교 주최로 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선열의 숨결을 기리고 뜨거운 애국심의 발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은 웅동 지역의 큰 자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