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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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黃氏 |
영어의미역 | Changwon Hw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대 |
[정의]
황충준을 시조로 하고 황응견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세거 성씨.
[연원]
창원 황씨의 시조는 황충준(黃忠俊)으로,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의 벼슬에 오른 사람이다. 창원 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황충준을 시조로 하는 시중 공파(侍中公派)[혹은 土黃이라 함] 외에, 고려 충정왕 때 문하평장사에 오른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는 공희 공파(恭僖公派)[혹은 檜山君派·唐黃이라 함], 고려 시대에 호장을 지낸 황양충(黃亮沖)을 시조로 하는 호장 공파(戶長公派)가 그것이다.
기세조(起世祖)는 황충준의 후손으로 고려 후기 정토 장군을 역임한 황신(黃信)으로 치고 있는데, 그것은 황충준과 황신 사이의 세계(世系)는 분명하지 않는 반면, 황신 이후의 세계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황신의 7세손인 회원군(檜原君) 황순경(黃舜卿)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황림(黃琳)은 선조 대에 이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다. 황림으로부터 파갈림한 황씨를 시중공파 안에서 의창군파라 한다.
창원 황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78명, 공신 2명, 상신 1명을 배출했는데, 시중 공파에서는 숙종 때 문과에 올라 부제학과 호조 참판을 지낸 황자(黃梓), 형조판서를 역임한 황인검(黃仁儉), 영조의 딸 화유 옹주(和柔翁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된 황인점(黃仁點) 3부자가 특히 유명하다. 공희 공파에서는 조선 성종 때 무과와 중시에 장원한 뒤 공조 판서에 이른 황형(黃衡), 황형의 아들인 대사간 황기(黃琦), 공조 및 호조 판서 황신(黃愼), 조선 중기에 학자로 유명했던 황근중(黃謹中)·황경중(黃敬中) 형제가 가문을 빛냈다. 호장 공파에서는 임진왜란 때 동지 돈령 부사가 된 황사우(黃士祐), 순조 때 명문장과 명필로 이름을 날린 황기천(黃基天)과 고종 때 명의 황필수(黃泌秀) 등이 유명하다.
[입향 경위]
창원 황씨의 창원 입향조는 의창군 황림의 증손인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황응견(黃應堅)이다. 황응견은 병자호란 이후 경상도 진주로 이거하여 거기에서 세상을 떴지만,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아들 황춘욱(黃春昱)을 데리고 창원 도호부 고산 마을로 다시 이거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황]
옛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 고산 마을은 현재 창원시 성산구 토월동에 속하는 곳이다. 창원시의 도시 계획에 따라 1994년 5월 말에 ‘고산’이라는 자연 마을은 철거되었고 이후 집성촌은 해체되었다. 회원군(檜原君) 황순경(黃舜卿)의 첫째 아들 후손의 일부는 의창구 북면 신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시조 황충준의 묘소가 창원시 성산구 웅남동 적현에 있고, 인근에 추경각(追敬閣)이라는 재실이 있다. 재실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기 어려우나, 애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고산 마을에는 1960년대 초에 지어진 고산재(高山齋)라는 재실이 있었는데, 이 건물은 2002년도에 성산구 토월동에 다시 지어졌다. 고산 황씨들이 시제를 모시는 곳이다. 2003년도에는 고산재 앞에 마을의 내력 등을 담아 고산 부락 유허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