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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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金氏 |
영어의미역 | Gimhae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대 |
[정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각 소종별로 입향조를 달리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 성씨.
[개설]
인구수가 가장 많고 우리나라 대표 성씨의 하나인 김해 김씨는 파 갈림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큰 파만 따지더라도 김녕군 휘 목경파(牧卿派), 목사공 휘 준파(樽派), 판도판서 문정공 휘 관파(管派) 등 12개나 되고, 또 각 파마다 다시 파 갈림이 되는 바, 이를테면 판도 판서 문정공 후 관파는 군수공 건파(健派), 집의공 맹파(孟派), 한림공 용파(勇派) 등 8개 파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창원에 세거하는 김해 김씨도 이런 다양한 파에서 다양한 시기에 입향하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연원]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199]은 가락국의 시조이다. 42년(유리왕 19) 금관 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九干)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비로 삼았다. 김해 김씨는 시조 수로왕의 12세손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김유신의 직계 종파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이다.
김해 김씨는 신라와 고려 시대를 통해 많은 문무 명신을 배출한 삼한 갑족에 속하며, 고려 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현(三賢)으로 칭송받는 김극일(金克一)·김일손(金馹孫)·김대유(金大有), 숙종 때 청빈하게 살면서 완인(完人)으로 불린 우의정 김우항(金宇杭), 이조 참판을 역임한 시문가(詩文家) 김현성(金玄成), 예조 판서 김조(金銚), 무장 김경서(金景瑞)·김완(金完), 학자 김자정(金自貞)·김덕승(金德承), 화가로 명망이 높은 김홍도(金弘道)·김양기(金良驥) 부자 등이 모두 김해 김씨 집안이다.
[입향경위]
1. 동읍 화양리, 옛 창원군 상남면 용동리·신리 입향조: 입향조는 동정공파(同正公派) 김귀(金龜)이다. 동정공은 고려시대 예빈승 동정 벼슬을 한 김호(金灝)이고, 김호의 7세손 김귀는 강원도 도사·전사관 등을 지냈는데, 무오 사화 때 창원에 유배되어 창원에서 죽었다.
2. 옛 창원군 상남면 퇴촌리 상촌 마을 입향조: 감무공파(監務公派)의 후손 김중철(金重喆)[1567~?]이다. 김중철 형제는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왜적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군인이었던 형이 적과 싸우다 죽기 전 후손 보존을 위해 몸을 피하라는 명에 따라 창원 전단산(栴檀山)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김중철은 뒤에 어모 장군이 되었다. 이를 단산공파(檀山公派)라 부른다.
3. 옛 창원군 상남면 지귀리 입향조: 삼현파 중 군수공파(郡守公派)인데, 입향조는 군수공 김건(金健)의 4세손인 김수(金秀)이다. 김건은 절효 선생(節孝先生) 김극일의 장남으로서 영광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이 파를 삼현파 안에서 군수공파라 부른다. 김수는 문과에 급제하고 청송 부사와 강릉 부사를 역임했는데, 무오사화를 당해 호남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4. 북면 내곡리, 외산리 초소마을 입향조 : 삼현파 중 녹사공파(錄事公派) 집안이다. 녹사공파는 절효 선생(節孝先生) 김극일의 5남인 녹사공 김인(金靭)의 직계로 이루어진 파이다. 김인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인 김철손(金鐵孫)에게는 다시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인 김대남(金大男)이 무오사화를 피해 창원으로 들어오게 됨에 따라 이 지역에 녹사공파가 세거하게 된다. 김극일과 그의 손자 김일손, 증손자인 김대유는 삼현(三賢)으로 불리는데, 김일손은 곧은 성품 때문에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하고 만다. 김일손이 화를 당하는 바람에 삼현파 후손들은 전국적으로 숨어 살게 되었다.
[현황]
동정공파는 두 지역에 나누어 살고 있다. 먼저, 동읍 화양리의 곡목 마을과 화목 마을, 금산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동정공파는 입향조 김귀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한 김이견(金以堅)[1648~1710], 김이견의 아들로 학자인 김상정(金尙鼎)[1668~1728], 역시 김귀의 후손인 학자 김병린(金柄璘)[1861~1940], 김병린의 아들로 1962년에 『창원 군지』를 편찬한 김종하(金鍾河) 등이 있다.
한편 옛 창원군 상남면 용동리·신리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또 다른 동정공파는 1980년대 전반기 이후 현재의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으로 옮겨 살고 있다. 창원 대학교와 경상남도 도청이 이 지역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10~12, 14~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종하, 창원에서 법률 사무소를 열고 있는 김익하 형제가 이 집안 출신이다.
단산공파는 옛 창원군 상남면 퇴촌리 상촌 마을에 세거하였다가, 1982년 이후 창원 대학교의 이전으로 현재의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으로 옮겨와 살고 있다. 옛 창원군 상남면 지귀리에 세거하던 군수공파 후손들은 창원시의 도시 계획에 따라 세거지를 떠나 현재 창원시 의창구 명서동과 마산합포구 중앙동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녹사공파는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에 40~50호, 외산리 초소 마을에 30호 정도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밖에 판서공 휘 불비파(不比派)의 파조는 김수광(金秀光)[1431~?], 김석공(金錫貢)[1463~1535], 김맹손(金孟孫)[1478~1502]으로 이어지는 후손의 일부가 창원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조사되지는 않았다. 또한 김해 김씨의 다른 한 일파로, 고려 지제고를 지낸 김여정(金麗精)을 중시조로 하며, 조선의 삼사 좌윤을 지낸 월촌 김성태(金成兌)를 거쳐 통덕랑 김경(金璟)이 전라남도 장흥에서 고성으로, 거기에서 다시 창원 대방동으로 이거하였고, 여러 대를 지내다가 다시 삼정자로 이거한 파가 있으나 역시 조사되지 않았다.
[관련 유적]
동정공파와 관련하여 1962년 김종하가 지은 『창원 군지』에는 이재(李栽)[1657~1730]가 지은 ‘어모장군행호분위전부장김이견묘갈명’, 이종기(李宗杞)가 지은 ‘김상정묘갈명’, 안붕언(安朋彦)이 지은 ‘김병린묘갈명’이 실려 있다. 사림동에 현대식 건물로 된 단산재(檀山齋)가 있고, 거기에 있는 ‘단산 재기’[김종하 찬]와 ‘단산재상량문’[이규형 찬]이 역시 『창원 군지』에 각각 실려 있다. ‘단산재기’에 의하면 옛 창원군 상남면 용동리·신리로 들어온 입향조는 한림 선조 6세손이고, 자호를 단은(檀隱)이라 한 김희량(金希亮)으로 되어 있다.
단산공파 입향조 김중철을 기리는 추모각(追慕閣)이 창원 대학교 학군단 건물 바로 뒷산에 있다. 이 건물은 애초[1936년]에 창원 대학교 안[옛 상촌 마을]에 있었으나, 창원 대학교의 이전으로 1980년대 전반기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창원 군지』에는 이현섭이 지은 ‘단산비각기’, 김병린이 지은 ‘어모장군김중철유허비’, 노근용이 지은 ‘어모장군김중철묘갈명’이 실려 있다. 또 청송 부사를 지낸 군수공파 입향조 김수(金秀)의 행적을 기린 ‘청송부사김수묘갈명’[김련 지음], 김수의 아들로 명종 때 병마 절제사를 지낸 김구성(金九成)의 행적을 기린 ‘병마절제사김구성묘갈명’[김련 지음], 김수의 9세손·10세손이 되는 김우진(金禹振)·김창용(金昌瑢) 부자(父子)의 효행을 기린 ‘김우진김창용부자비’[노근용 지음]가 『창원 군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