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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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律熙 |
영어음역 | Gim Yulhui |
이칭/별칭 | 소율희(蘇律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통일 신라 시대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호족.
[활동사항]
김율희는 김해 지역의 호족으로 소율희(蘇律熙)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된다. 소율희는 ‘쇠유리’의 한자 표기이다.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로 재직 중이던 907년(효공왕 11)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림사(鳳林寺)를 창건한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가 명주(溟州)[현 강원도 강릉 지역]를 거쳐 진례(進禮)[현 경상남도 창원시 토월동 일대]까지 왔을 때 진례성으로 맞아들이고 불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와 관련된 김율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鳳林寺 眞鏡大師寶月凌空塔) 비문(碑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진경대사 심희는) 얼마 후 김해(金海)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갑자기 이 산을 떠나 남쪽으로 가겠노라 하였다. 진례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니, 이에 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던 진례성제군사 김율희가 (대사의) 소문을 듣고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절을 고쳐 주며 법의 수레를 머물도록 청하였는데,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였고, 병든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의원을 만난 듯하였다.”
또한 봉화(奉化) 태자사(太子寺) 낭공대사백월서운탑(朗空大師白月栖雲塔)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그러던 중 (대사 심희가) 홀연히 다음 해 여름 끝자락에 잠깐 경기(京畿)를 하직하고 바닷가로 행각하다가 김해부(金海府)에 이르니, 지부(知府) 소충자(蘇忠子)와 동생인 영군(領軍) 율희가 옷깃을 여미고 (대사 심희의) 덕풍(德風)을 흠모하던 중, 옷깃을 열고 도를 사모하여 이름난 절에 주석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창생을 복되게 하기를 희망한 것이었다.” 영군은 군사책임자에 해당하므로 진례성제군사라는 직함과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또 김율희는 911년(효공왕 15) 중원에서 귀국하여 김해에 도착한 대사 이엄(利嚴)이 불법을 펴는 일을 후원했다. 이와 관련하여 해주(海州) 광조사(廣照寺) 진철대사보월승공탑(眞澈大師寶月乘空塔) 비문(碑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천우(天祐) 8년에 뗏목으로 큰 파도를 무사히 헤치고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도달하였다. 이때 ……동쪽으로 나아갔다. 마침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 소율희의 귀의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승광산(勝光山) 중의 연하(煙霞)의 절경에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정성스러운 큰 뜻을 기울여 (대사가) 이 절에 계시도록 청하였다.”
김율희의 신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두품보다 낮은 촌주(村主)로 추정되기도 한다. 성씨가 ‘소(蘇)’와 ‘김(金)’으로 달리 표기되는 것은 원래 성씨가 없었으나 김해 지역의 호족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성씨를 사용하고, 그에 어울리는 직책을 표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