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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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用龜 |
영어음역 | Han Yonggu |
이칭/별칭 | 계형,만오,용구,익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월곡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장리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초명은 용구(用九).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후유(韓後裕)이다.
[활동사항]
한용구(韓用龜)[1747~1828]는 영조 대부터 정조, 순조의 3대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1772년(영조 48) 황감제(黃柑製)에 장원 급제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76년(영조 52)에 주서(注書)가 되었다. 예조좌랑(禮曹佐郞)·응교(應敎)·대사간(大司諫)·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거쳤다.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있던 1796년(정조 20)에 왕을 모독했다는 죄로 삭주에 유배되었으나 다시 형조참판(刑曹參判)·대사헌(大司憲)·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이 때에 진하사겸사은부사(進賀使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1802년(순조 2)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1805년(순조 5)에 우의정에 올랐다. 1806년(순조 6) 김달순(金達淳)의 사사(賜死) 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가 1809년(순조 9)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11년(순조 11) 약원도제조(藥院都提調)를 겸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가 책립된 뒤 좌의정겸세자부(左議政兼世子傅)가 되었으며 사직을 여러 번 청했으나 순조의 신임이 두터워 사퇴가 허락되지 않았다. 1821년(순조 21) 영의정이 되었고 이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며, 효의왕후(孝懿王后) 장례 후에 관직을 사퇴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월곡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익정(翼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