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890
한자 朝鮮通信使
이칭/별칭 통신사(通信使),보빙사(報聘使),회례사(回禮使),회례관(回禮官),통신관(通信官),경차관(敬差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문소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지도보기
소재지 문소루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
소재지 관수루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산121-6지도보기

[정의]

조선 시대 일본막부에 파견된 공식 외교 사절단.

[개설]

통신사(通信使)는 조선이 일본의 막부 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했던 공식 외교 사절단을 말한다. 1403년(태종 3)과 1404년 조선과 일본이 각각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이 되어 상호간에 사절, 즉 통신사와 국왕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때에 따라서 보빙사(報聘使)[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회례사(回禮使)[사신을 보내 왔을 때 그 답례로 파견하는 사절]·회례관(回禮官)·통신관(通信官)·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에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 國王使)라 하였다.

[의성과 조선 통신사]

경상북도 의성군은 통신사 연고 도시로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통신사 일행을 책임지는 삼사(三使)가 세 명이나 배출된 고장이자, 통신사의 하행로(下行路) 중 한 곳으로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삼사의 배출지]

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의 삼사 이하, 화원(畵員)·의원(醫員)·역관(譯官)·악사(樂士) 등 총 400~500명으로 구성된다. 400여 명의 통신사 일행을 책임지는 것은 삼사였다. 정사는 통신사의 총책임자로서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해야 하므로 학식과 인격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선발하였다. 부사는 정사를 곁에서 보좌하는 역할로서 본래 관직보다 승진시켜 파견하였다. 종사관은 매일 있었던 일을 기록하여 귀국 후 국왕에게 보고하는 주요 임무를 맡았으므로 문관 중에 선발하였다.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서는 박안신(朴安臣)[회례사]·박서생(朴瑞生) 등 2명의 정사와 김성일(金誠一) 등 부사 1명, 총 3명의 삼사를 배출하였다. 1424년(세종 6) 회례사로 파견된 상주목(尙州牧) 단밀현(丹密縣)[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출신 박안신의 사행은 자료의 소략으로 사절단의 규모와 일본 내 활동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회례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만큼 일본 측의 요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이 사절단을 파견한 이유는 『세종실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세종 실록』에는 1422년과 1423년 일본에서 규주(圭籌) 등이 파견되어 서간(書簡)을 전하고 방물(方物)을 바치며 『대장경(大藏經)』을 청하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하지만 일본 사신단은 그들이 요구하던 한자로 된 대장경판은 얻지 못하고 범자(梵字)로 된 화엄경판(華嚴經板) 등을 구하여 돌아갔다. 일본에서 파견된 사신단에 대한 예로서 조선에도 회례사가 꾸려지는데 이때 박안신은 정사로 임명이 되어 국왕의 답신과 함께 선물을 가지고 일본 사행길에 오른다. 박안신이 가지고 간 물건의 면면을 살펴보면 밀교 대장(密敎大藏) 및 주 화엄경판(注華嚴經板)을 비롯하여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密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석가보(釋迦譜)』 등의 법경과 곡식 및 생필품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일본이 사신단을 보내온 목적이 문화 수용과 경제적인 것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28년 최초의 통신사 정사였던 비안현(比安縣)[현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출신 박서생의 사행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1428년 5월 7일 대마도 도만호(對馬島·都萬戶) 좌위문 대랑(左衛門大郞)이 사신을 보내 무로마치[室町] 막부 5대 장군 아시카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1월 18일 사망하였음을 조선 정부에 알려왔다. 7월 15일 이시시로[石城] 관사(管事) 쇼카네[宗金]가 재차 아시카와 요시모치의 사망과 그의 아우 아시카와 요시노리[足利義敎]가 장군직을 계승하였음을 조선 정부에 알렸다. 조선에서는 교린의 예로 부의(賻儀)를 전달하고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였다.

1428년 12월 7일 대사성(大司成) 박서생을 정사로 하여 부사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서장관(書狀官) 전 부교리(副校理) 김극유(金克柔)를 삼사로 한 통신사가 국서와 예물을 받들고 사행에 나섰다. 당시 즉위 축하 예물로 안자(鞍子) 1면(面), 흑세마포(黑細麻布)·백세저포(白細苧布)·백세면주(白細綿紬) 각 20필, 인삼(人蔘) 200근(觔), 호피(虎皮)·표피(豹皮) 각 10영(領), 난초 방석(蘭草方席)·만화침석(滿花寢席) 각 10장, 송자(松子) 500근, 청밀(淸蜜) 20두(斗)를 보냈고, 제구(祭具)로 백세저포(白細苧布)·흑세마포(黑細麻布) 각 20필을 보냈다. 박서생이 정사로 임명되었던 사절단의 규모나 일본 내 노정,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의 소략으로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의성 지역 출신 김안국이 부사로 임명된 1590년(선조 23) 통신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파견된 통신사였다. 당시 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통신사가 사행에서 돌아온 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상반된 보고를 올리면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상반된 보고로 혼란을 겪던 정치권은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

[조선 통신사의 길]

통신사의 국내 노정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하행로와 귀로 때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상행로가 달랐다. 이는 통신사의 소요 경비를 담당하였던 경유지 군현의 부담을 덜기 위함이었다. 의성 지역은 통신사의 하행로[양재-판교-용인-양지-죽산-무극-숭선-충주-안보-문경-유곡-용궁-예천-풍산-안동-일직-의성-청로-의흥-신녕-영천-모량-경주-구어-울산-용당-동래]에 속했다.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을 보면 “의성현에서 유숙하고, 청로역에서 점심 먹었다”, “의흥에서 유숙 할 때는 청송·비안 등 고을에서 지대하였는데, 비안에서 종행인을 제공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의성 지역이 통신사 파견로로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여지도서』에는 의성 지역 출신인 김성일이 통신사 부사로 파견 될 당시 문소관에서 남긴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통신사 사행길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문소관에서 자고 온 일 어느 듯 꿈이로다/ 높은 수레 고국 지나 활을 짐도 군은이라/ 역로에 봄은 짙고 산성에 비가 캔다/ 이렇게 좋은 철에 만리 외국 떠나다니

이밖에 통신사 전별 연회(餞別宴會)에서 청송 기생들의 쌍검무가 펼쳐졌던 문소루, 상행로 중 점심을 먹었던 관수루(觀水樓) 등 통신사와 관련된 문화유산들이 의성 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관련 기록]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시문·글씨 등을 많이 남겼으며, 그것은 병풍·회권·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다.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숙종 연간에 신유한(申維翰)이 저술한 『해유록(海遊錄)』, 강홍중(姜弘重)이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동사록(東槎錄)』,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 유상필(柳相弼)의 『동사록(東槎錄)』, 조명채(曺命采)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錄)』 등이 있다. 대부분 통신사에 참여한 인물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당시 문물 교류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의성 출신의 삼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율정선생일고(栗亭先生逸稿)』를 비롯하여 『동문선(東文選)』, 김성일의 『해사록』 등이 있다. 『율정선생일고』는 병산 박씨(屛山朴氏) 집안의 문집을 모은 『병산세고(屛山世稿)』 안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박서생이 지은 시와 행장이 실려 있고, 부록에는 이태일(李泰一)이 지은 박서생의 행장과 6대 손인 박준(朴峻), 김종직(金宗直)의 「이존록(彛尊錄)」, 「여지승람(輿地勝覽)」,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월사집(月沙集)」, 「신락전집(申樂全集)」, 「백주집(白洲集)」 등에 실려 있는 박서생의 기록을 모아둔 행록(行錄)이 있다. 그중 「봉사일본유감(奉使日本有感)」은 칠언 율시로 통신사로 가서 본 일본의 풍광에 대해 노래한 시이다. 일본의 기이한 볼거리에 대해 사신으로 오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임금의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동문선』에도 실려 있는데, 사행 때 지은 2수의 시가 전해진다. 시에는 사명을 수행하는 사신으로서의 책임감과 함께 사행의 험난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해사록』은 김성일이 53세 때인 1590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지은 시와 서간 및 잡저를 묶은 책이다. 이 책은 일본 사행 기간 동안 있었던 김성일의 활동 상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일본 외교와 관련한 김성일의 사상과 정책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양국 관계에 관련된 외교사 내지 국제 정치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 밖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유성룡의 『징비록』,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등에 의성 출신의 삼사와 관련된 기사들이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조선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양국의 공식 국가 사절단으로서, ‘통신(通信)’이란 말처럼 신의를 나누던 선린우호(善隣友好)의 상징이자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이었다.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 양국에는 통신사들이 머물며 지나갔던 육로와 해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많은 건축 공간과 유적, 유물들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 통신사 길’을 한국과 일본 공동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사정 속에 통신사 삼사의 배출지이자, 파견로였던 의성 지역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2005년 의성에서 ‘조선 통신사 재현 행렬’ 행사에 참여한 것 역시 의성 지역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 때문인 것이다. 앞으로도 통신사와 관련하여 학술적 연구와 민·관·학이 합심하여 통신사 관련 행사와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통신사에서 의성 지역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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