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안계 적색 농민 조합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888
한자 義城安溪赤色農民組合
이칭/별칭 의성 안계 혁명적 농민 조합,흥산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 운동 단체
설립자 박명줄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에 있었던 농민 조합.

[개설]

의성 안계 적색 농민 조합은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을 펼치면서 조직한 농민 조합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당시에 지주와 소작 농민 사이의 소작 관계는 지주에게 유리하였다. 의성 안계 적색 농민 조합은 이러한 불합리한 관계를 바꾸어 농민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농민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되었다.

[변천]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의 농민 운동은 1920년대 대구 지역에서 대구 청년 동맹과 신간회 대구 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박명줄(朴明茁)이 1931년에 농민을 주체로 하는 혁명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의성 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안계면은 의성의 대표적 농업 생산지이고, 주민의 상당수가 소작농인 까닭에 농민 운동을 벌이기에 적절한 지역이었다. 박명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면서 안계면과 그 인근 면의 농민을 대상으로 농민 조합 설립에 나섰다.

이때 외형적으로는 흥산계(興産契)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며, 안계면과 인근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비안면, 구산면, 다인면의 농민을 대상으로 조합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주요 활동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박명줄안계면, 단북면, 비안면, 구산면, 다인면 등 5개 면의 농민을 대상으로 하여 조선 농촌의 소작 관행이 지주와 소작인 간의 불합리한 착취 관계에 놓여 있음을 설명하였다. 곧 그는 의성군의 농민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풍년에 기근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거나 안계면 부근 소작 농민의 생활 상태가 다른 지방과 비교해 보아도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모두 소작 관계의 불합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다시 말해 지주의 과다한 소작료 징수와 지세 등 각종 세금을 소작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까닭에 소작 농민의 경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러한 의성 지역 소작 농민의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작 농민이 단결하여 농민 조합을 만들고, 착취하는 지주에게 맞서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집단 농장을 소개하면서, 집단 농장이 높은 생산력과 교육 기회를 보장하는 적합한 형태로 무계급 사회의 표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 당국은 의성 안계 적색 농민 조합, 곧 흥산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면서, 점차 흥산계를 무력화시키고자 탄압을 가했고, 농민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농민 조합은 여러 면에 흩어져 있는 조합원을 총동원하여 ‘농민 조합 만세!’라고 쓴 깃발 40여 개를 만들어 안계면의성읍을 오가며 탄압 반대 시위를 계획하였고, 야간에 10여 차례 불을 질러 탄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의성 안계 적색 농민 조합의 직접적 행동에 대해 일제 당국은 ‘테러단’으로 규정하면서, 조합원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이때 일제 경찰에 잡힌 농민이 무려 500여 명에 달했다. 일제 경찰은 그 가운데 박명줄, 임응우, 이원영, 박근○, ○영석, 박○○ 등 6명을 검사국으로 넘기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의의와 평가]

1930년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에서도 지역의 소작 농민이 주체가 되어 농민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때의 농민 운동은 비합법적 대중 운동을 기본으로 하면서 ‘계’를 통한 합법 공간을 이용하였으며, 농촌을 대상으로 지역 단위의 혁명적 대중 운동을 일으키던 당시의 전국적인 흐름과 연계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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