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377
한자 敎會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홍수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있는 개신교인들의 의례 및 집회 장소.

[개신교의 전래와 사랑방 예배]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에 살던 김수영은 1893년 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 장터에서 선교사 배어드의 노방 전도를 듣고 감화를 받아 의성 지역 최초의 개신교 신도가 되었다. 1900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수영의 전도로 하나 둘 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신교 전래 초기에는 교인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사랑방을 기도처로 정하여 집회하거나, 집집을 돌며 예배를 보았다. 그러나 좁은 사랑방에 갓을 쓴 신도들이 여럿이 둘러 앉다보니 이마와 눈이 갓에 찔리곤 했다. 그럴 때면 웃음이 터져 엄숙했던 분위기가 풀어지고 서로의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초가로 지은 최초의 예배당]

개신교 전래 초기에는 집회할 곳이 마땅치 않아 예배를 보기 위하여 교인들이 모여 있는 옆 마을로 가거나, 더러는 십 리 길을 걸어 예배당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한 불편을 감내할 수는 없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신도의 수가 늘어나자 같은 마을의 사람들은 함께 모여 기도처를 마련하거나 예배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들은 신도들이 헌금을 모으거나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는데, 그 규모는 대체로 초가 몇 칸의 작은 예배당이었다.

의성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인 비봉 교회는 1902년 초가 4칸으로 시작하였으며, 1903년 두 번째로 설립된 쌍계 교회는 초가를 기역자 모양으로 지어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이후 의성의 복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많은 교회들이 늘어난 신도들을 위하여 예배당을 더 크게 짓고 지붕에 기와를 얹거나 목조 건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초가 3칸의 기도소로 시작된 의성 교회는 불과 5년 만인 1913년에 기와집 30칸의 예배당으로 증축되었다. 이는 교세가 그만큼 급속히 신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의 수난기]

순조롭게 성장하던 의성의 개신교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의 1면 1교회 정책으로 덕지 교회, 의성 교회, 양서 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폐쇄되었다. 일제의 만행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폐쇄된 교회의 자재를 팔아 전쟁 자금을 대는 데 사용하였다. 대사 교회는 1942년 일본 경찰들이 목조 예배당을 뜯어가 안평 경방단(警防團) 본부로 사용하였고, 박곡 교회창길 교회의 예배당은 교인들의 집회 장소가 아닌 면사무소 창고로 사용되었다.

현리 교회는 일제가 예배당을 헐어가려하자 신도들이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예배당을 철거하여 버렸다. 이렇게 다니던 교회가 폐쇄된 신도들은 교회를 옮겨 다니며 예배를 보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성경과 찬송가책도 빼앗기고 가정 예배도 금지 당하면서 교회는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교회는 집회를 재개하고 예배당을 새로 지으며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의성의 개신교는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예배당이 또 다시 파괴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은 피난민들의 안식처로 제공되었던 의성 교회가 폭격으로 인해 예배당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의성 각지의 교회가 전쟁으로 수난을 겪는 와중에 무사한 곳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매곡 교회였는데, 이곳은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 인민군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에 있는 구세군 원당 영문6·25 전쟁으로 원당리가 큰 폭격의 피해를 입었으나 예배당이 있는 쪽만은 무사하였다.

[위기 끝에 성장한 교회]

6·25 전쟁 으로 예배당을 잃은 교회들은 신도들의 헌금과 외국 선교부의 원조 등으로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의성의 개신교는 교회와 신도의 수에 있어 꾸준히 증가세를 이어왔다. 그러한 데는 장로교 교단의 분리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국의 장로교 교단은 1959년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을 두고 찬·반 양론으로 나뉘면서 교단이 양분되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장로교 소속 교회가 대부분이었던 의성 지역 또한 교단이 나뉘면서 이전에는 하나였던 교회가 둘로 나뉘어 한 마을에 두 교회가 서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교단 분리라는 일련의 위기 속에서도 신도의 수가 늘어나면서 개신교계는 1960년대에 들어와 부흥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는 늘어난 교인으로 모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분립한 교회도 생겨났는데, 1967년 고현 교회, 1973년 금오 교회 등이 그와 같은 예이다.

교회는 늘어난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시설을 현대식으로 개축하면서 더욱 발전해갔다. 교회에는 예배당뿐만 아니라 사택과 교육관이 설립되면서 서서히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오늘날의 의성 교회]

2012년 현재 의성 지역에는 11개의 교단이 들어와 있다. 교단별 교회 수는 감리교 1곳, 구세군 4곳,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안 노회 30곳, 성결교 1곳, 안식교 5곳, 여호와의 증인 1곳, 장로교 119곳, 침례교 2곳, 통일교 1곳, 통합 교회 1곳으로 총 165곳이 있다. 의성 군민 중 10%인 5,907명이 기독교인이다.

신도들이 몇 백 명에 이르는 대형 교회는 예배당을 포함하여 사택, 교육관, 식당, 주차장 등의 세련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골 한적한 곳의 아담한 교회 또한 사랑방 역할을 자처하며 교인들이 예배를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또한 오늘날의 의성 지역의 교회는 부속 유치원과 무료 아동 센터를 설립하고, 도서관과 휴게소 등을 개방하여 교인들의 집회소에서 더 나아가 지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공간으로 점차 변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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