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109
한자 李泰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 7월 12일연표보기 - 이태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1월 - 이태직 을사늑약 반대 「소회 진술문」 작성
활동 시기/일시 1910년 8월 - 이태직 일본 정부에 합병 취소, 국교 복구 장서 발송으로 구속됨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이태직 납세·부역 거부, 명치천황 사망 복상 반대로 구속됨
관련사건 시기/일시 1912년연표보기 - 납세와 부역 거부, 소위 명치천황 사망 복상(服喪) 반대
몰년 시기/일시 1913년 10월 5일연표보기 - 이태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7년 5월 9일 - 경산 이태직 기념 사업회 설립
추모 시기/일시 1969년 5월 - 경산 이태직 선생 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82년 - 이태직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이태직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활동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성격 국권 회복 운동
성별
대표 경력 을사늑약 반대 「소회 진술문」 작성|일본 정부에 장서를 보내 구속됨|납세와 부역 거부, 소위 명치천황 복상(服喪) 반대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능(大能). 호는 경산(耕山). 고려 시대 영동정(領同正) 이전(李磚)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이장수(李章秀)이며 어머니는 문소 김씨(聞韶 金氏)이다.

[활동 사항]

이태직(李泰稙)[1878~1913]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출신으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 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즉시 서울로 올라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여 늑약의 폐기를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문서를 압수당하고 옥고를 겪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일본 정부에 “합병을 취소하고 국교를 복구하라.”는 장서(長書)를 보내려 하였다. 이태직의성 경찰서에 장서를 압수당하고 잡혀가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어머니는 “이 어미 때문에 뜻을 변치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옥고를 치르고 있는 중에 군민은 물론이고 부녀자들로부터도 매일 끊임없이 격려와 사식을 제공받았다. 이리하여 의성 군민들은 “의성(義城)에도 죽엽(竹葉)과 같은 충신(忠臣)이 있다.”고 칭송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의열(義烈)이 군민들을 감화시킨 결과였다. 일본 경찰은 그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석방하였다.

그 후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만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2년 일제에 대한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나아가 소위 명치천황(明治天皇)이 죽자 복상(服喪)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 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태직은 36세로 옥고와 울분으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태직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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