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31
한자 朴安臣
이칭/별칭 백충(伯忠),정숙(貞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69년연표보기 - 박안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93년 - 박안신 생원과에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99년 - 박안신 식년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08년 - 박안신 사간원 정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08년 - 박안신 유배
활동 시기/일시 1412년 - 박안신 의성 현령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20년 - 박안신 오천 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24년 - 박안신 회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박안신 형조 판서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0년 - 박안신 의정부 우참찬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42년 - 박안신 공조 판서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2년 - 박안신 이조 판서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4년 - 박안신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447년연표보기 - 박안신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상주(尙州)
대표 관직 예문관 대제학

[정의]

의성 현령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상주(尙州)[상산(尙山)]. 초명은 안신(安信). 자는 백충(伯忠). 시호는 정숙(貞肅). 아버지는 박문로(朴文老), 할아버지는 박전(朴瑔), 증조할아버지는 박원정(朴元挺)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손자 박사춘(朴士春)이 1462년 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은거하면서, 이곳의 상주 박씨 입향조가 되었다고 한다.

[활동 사항]

박안신(朴安臣)[1369~1447]은 1369년(공민왕 18)에 출생하였다. 1393년(태조 2) 생원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399년(정종 1)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으로 등용되면서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408년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이 되었는데, 강직한 성향 때문에 정치적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해 태종의 딸 경정 공주(慶貞公州)의 남편 조대림(趙大臨)목인해(睦仁海)의 꾐에 빠져 도성에서 군사를 일으키다가 순군사(巡軍司)에 감금되는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박안신은 대사헌(大司憲)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태종에게 알리지 않고 조대림을 고문하였다. 이에 태종이 크게 노해 두 사람을 죽이려 했다. 맹사성은 매우 두려워했으나, 박안신은 두려운 빛 없이 태연히 사람을 시켜 기와 조각을 가져 오게 했다. 그것으로 박안신은 “직책을 잘 받들지 못하였으니 달게 죽음을 받지만, 임금께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도다.[爾職不供甘受死 恐君留殺諫臣名]”라는 시를 남겨 태종에게 보내주었다. 그때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이 병을 무릅쓰고 용서를 간하였고, 황희(黃喜),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도 사건을 무마하여 유배에 그치게 되었다.

1412년(태종 12) 의성 현령(義城 縣令)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태종박안신을 신임하여 안신(安臣)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기도 했다. 1420년(세종 2) 면천군사(沔川郡事)가 되었으며, 1424년(세종 6)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박안신은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적을 만나게 되었다. 적이 칼을 빼들고 함부로 배 속에 뛰어들어 행구(行具)를 약탈하는데, 박안신은 큰 상에 앉아 꿈적도 하지 않았다. 해적들은 이러한 박안신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므로, 일행들도 안전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는데 공조(工曹),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참의(參議), 병조, 예조, 형조(刑曹), 공조, 이조(吏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기도 했으며,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등 4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면서는 국방을 강화하는데 일조하였다. 1439년(세종 21) 형조 판서(刑曹 判書), 1440년(세종 22)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 1442년(세종 24) 공조 판서(工曹 判書)가 되었으나, 나이로 사직을 청한 뒤 이조 판서(吏曹 判書)로 전직되었다. 1444년(세종 26)에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현직 고관과 종친·외척을 가리지 않고 비리가 있으면 강력하게 탄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447년(세종 29) 세상을 떠났다.

[묘소]

오랫동안 실전(失傳)되어 오다, 근래에 유적을 확인한 뒤 경상북도 상주시 개운동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숙공(貞肅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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