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몽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19
한자 南夢賚
이칭/별칭 중준(仲逡),이계(伊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0년연표보기 - 남몽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1년 - 남몽뢰 향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2년 - 남몽뢰 생원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4년 - 남몽뢰 성균관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남몽뢰 권지성균관학유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남몽뢰 봉상시 부봉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남몽뢰 율봉도 찰방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남몽뢰 조산대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남몽뢰 봉열대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남몽뢰 사헌부 감찰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남몽뢰 「동국소승」 저술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남몽뢰 형조 좌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남몽뢰 임실 현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남몽뢰 파직됨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남몽뢰 임실 현감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남몽뢰 용양위 부사과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1년 - 남몽뢰 사헌부 감찰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1년 - 남몽뢰 고성 현령 겸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남몽뢰 호조 정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7년 - 남몽뢰 예조 정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0년 - 남몽뢰 병조 좌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1년 - 남몽뢰 충좌위 사정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1년 - 남몽뢰 병조 정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1년 - 남몽뢰 함양 군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남몽뢰 진주 목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4년 - 남몽뢰 「기혜예송시말」 저술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남몽뢰 통례원 우통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남몽뢰 선산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남몽뢰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81년 - 남몽뢰 흥양에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81년연표보기 - 남몽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89년 - 남몽뢰 복관
추모 시기/일시 1850년 - 남몽뢰 이산사에 배향
출생지 신촌리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동변리
거주|이주지 윤곡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수학지 이계당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임실 현감 - 전라북도 임실군
부임|활동지 고성 현령 - 경상남도 고성군
부임|활동지 함양 군수 - 경상남도 함양군
부임|활동지 선산 부사 - 경상북도 구미시
유배|이배지 흥양 - 전라남도 고흥
묘소|단소 금당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금곡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이산사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양(英陽)
대표 관직 선산 부사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준(仲逡). 호는 이계(伊溪).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남해준(南海準), 어머니는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 권지(權誌)의 딸 안동 권씨(安東 權氏), 할아버지는 증 공조 좌랑(贈 工曹 佐郞) 남추(南樞), 증조할아버지는 남응진(南應震), 부인은 신지의(申之義)의 딸 아주 신씨(鵝洲 申氏)이다.

[활동 사항]

남몽뢰(南夢賚)[1620~1681]는 1620년(광해군 12) 12월 9일 경상도 의성현 북쪽 신촌리(新村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동변리 월촌(月村)]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후 인근 윤곡(尹谷)[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에 정착하였다. 4세에 자서(字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5세에는 속문(屬文)에 능했다고 한다. 13세 때에는 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였다. 1641년(인조 19) 향시(鄕試)에 급제하였고, 1642년 생원시에 급제한 뒤, 1644년(인조 22)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문과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652년(효종 3)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 成均館 學諭)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해 봉상시 부봉사(奉常寺 副奉事)와 율봉도 찰방(栗峯道 察訪)에 임명되었고, 1653년(효종 4) 조산대부(朝散大夫), 곧 이어 봉열대부(奉列大夫)가 되었고, 고향인 윤곡의 이계(伊溪)에 정사(精舍)를 지어 이계당(伊溪堂)이라 하였다.

1655년(효종 6)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제수되나 곧 부친을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고, 「동국소승(東國小乘)」을 저술하였다. 1656년(효종 7)에는 과거에 급제한 동년배의 여러 인사들과 더불어 경신계헌(庚申稧憲)을 만들었는데, 남몽뢰가 서문을 작성하였다. 1656년 형조 좌랑, 임실 현감(任實 縣監)에 임명되었으나, 겨울 어사(御史)의 보고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1657년(효종 8) 전라도 관찰사가 치적이 있는 수령을 처벌 할 수 없다는 상서를 올려 임실 현감에 다시 복직하였다. 1659년(효종 10) 용양위 부사과(龍驤衛 副司果)가 되었다.

1660년(현종 1) 김시온(金是榲)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661년(현종 2) 사헌부 감찰, 고성 현령(固城 縣令) 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에 임명되었고, 왕명에 따라 동지하전(冬至賀箋)을 지어 올렸다. 임실과 고성에서 수령을 지낼 때, 「거관불망기(居官不忘記)」를 지어 자신과 후임 수령들에게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1666년(현종 7) 호조 정랑, 1667년(현종 8) 예조 정랑에 올랐으나, 부친의 상사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1670년(현종 11) 병조 좌랑, 1671년(현종 12) 충좌위 사정(忠佐衛 司正), 병조 정랑, 함양 군수(咸陽 郡守)에 임명되었다.

함양 군수 시절, 아사자와 유민들을 진휼하였다. 1672년(현종 13) 경상도 관찰사 민시중(閔蓍重)이 도내 진휼을 잘한 수령들을 적어 보낼 때 함양 군수 남몽뢰가 추천되었으며, 그 공으로 준직(準職)[품계에 해당하는 직책]을 명받았다. 1673년(현종 14) 진주 목사(晉州 牧使)로 부임하였다. 1674년(현종 15) 기해예송(己亥禮訟) 때의 입장을 밝힌 「기해예송시말(己亥禮訟始末)」을 작성하였다.

1675년(숙종 1) 순무사(巡撫使) 권대재(權大載)의 별단(別單)으로 숙종에게 표리(表裏) 한 벌을 특사 받았다. 그해 겨울 병환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에게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78년(숙종 4)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숙종이 꺼리고 있는 예론(禮論)과 관련된 것이어서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1679년(숙종 5) 통례원 우통례(通禮院 右通禮)에 제수되었고, 곧 선산 부사(善山 府使)가 되었으나 경상도 관찰사의 고전(考殿)으로 파직되고 말았다. 조미(租米) 착복 등의 문제를 선산부의 한 백성이 관찰사에게 고했기 때문이다.

파직 후 남몽뢰는 향촌으로 돌아와 향촌 교화에 힘썼으나,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에 끌려갔다. 남인의 핵심 인사였으며, 예송에 깊숙이 간여했던 관계로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서인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1681년(숙종 7) 옥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남몽뢰는 선산 부사 재임 시절 있었던 문제를 정적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받았고, 결국 장오죄(贓汚罪)로 흥양(興陽)에 유배를 가게 된다. 하지만 서인들은 남몽뢰에 대한 지속적인 형신이 필요하다며 압송을 요구하고, 11월 15일 한성부로 다시 압송되어 가는 도중 남원(南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숨을 끊기 전에 과거를 보지 말며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남몽뢰는 가학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김시온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는 6권 3책의 『이계집(伊溪集)』과 3권 2책의 『이계속집(伊溪續集)』이 전한다. 『이계집』은 후손 남성천(南聖天)과 남상의(南象儀) 등이 18세기 후반 정본을 만들어 두었다가, 1820년 간행한 것이다. 『이계집』 권1 부(賦)의 「동국통감부(東國通鑑賦)」는 단군 조선 이하 우리나라의 역사를 간추려 운문으로 엮은 것이며, 권3 잡저(雜著)의 「동국소승(東國小乘)」은 단군 조선 때부터 역사를 간략히 기술한 것으로 남몽뢰의 역사 인식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권4 잡저의 「기해예론시말(己亥禮論始末)」에서는 예송 논쟁 당시, 남인(南人)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이계속집』은 본집에 누락된 시(詩), 서(書), 소(疏), 잡저(雜著) 등을 보충하여 1937년에 간행한 것이다.

[묘소]

묘소는 금당(金堂)[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금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89년(숙종 15) 장손인 남윤주(南胤冑)가 상소를 올려 복관(復官)되었다. 1850년(철종 1)에는 이계당 동쪽에 남몽뢰의 위패를 모신 이산사(伊山祠)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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