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리 마산 봉수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703
한자 觀德里馬山烽燧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 산96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신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 -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관덕리 마산 봉수터 지표 조사 실시
소재지 관덕리 마산 봉수터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 산96 일원지도보기
성격 봉수|봉수터
소유자 사유지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터.

[변천]

관덕리 마산 봉수터 유적과 관련하여 1425년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의성현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산 봉화는 [남쪽의 영니산 봉화를 받아] 북쪽으로 15리 거리에 있는 안동에 속한 일직현의 감곡산 봉화에 보낸다[馬山烽火 北望 安東任內 一直縣地 甘谷山烽火 相去十五里].” 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1454년의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봉화는 두 곳에 있는데, 현의 남쪽에 있는 영니산 봉화는 남쪽으로 의흥현의 승목산 봉화를 겨누고 북쪽으로 현내의 마산 봉화를 겨눈다. 마산 봉화는 북으로 일직 감곡산 봉화를 겨눈다[烽火二處 盈尼山在縣南 南准義興縄木山 北准本縣 馬山 馬山北准一直甘谷山].” 라고 하여 역시 영니산 봉화와 마산 봉화의 내용만 보인다. 1469년에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서는 “현 북부에 있는 마산 연대 봉화는 남쪽으로 현내의 고성산 연대 봉화와 더불어 서로 겨누고, 북으로 안동에 속한 일직현의 감곡산 연대 봉화와 서로 겨눈다[縣北部馬山烟臺烽火 南與縣內古城山烟臺烽火相准 北與安東任內 一直縣甘谷山烟臺烽火相准].” 라고 했다. 또한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마산 봉수는 북으로 안동부 감곡산에 응하고 남으로 고성산에 응한다[馬山烽燧 北應安東府甘谷山 南應古城山].”라고 하여 임진왜란 이전부터 관덕리 마산 봉수터와 관련된 기록은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조선 후기의 『경상도읍지』에도 “마산 봉수는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안동부의 마곡산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馬山烽燧 在縣北三十里 北應安東府馬谷山 南應古城山].” 라고 하였고, 『영남읍지(嶺南邑誌)』에도 같은 내용의 기사가 있으며, 1864년경에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르기까지 각종 자료에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문헌 자료를 통해 볼 때 관덕리 마산 봉수는 조선 시대 전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던 봉수라고 할 수 있다.

[위치]

관덕리 마산 봉수터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 산96, 산81-1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관덕리 목촌 마을 북서쪽에 있는 봉화산 정상에 오르면, 관덕리 마산 봉수터를 확인할 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8년 4~5월 사이에는 의성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에서 의성 관내 봉수 유적에 대한 문헌 조사와 지표 조사가 있었다. 2004년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지표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지금까지 발굴 조사는 없었다.

[현황]

관덕리 마산 봉수터 유적은 북쪽 부분에 높이 50㎝ 정도의 외곽 담장을 석축하였고, 이외 부분은 토석 혼축으로 축조하였으나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외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며 그 외곽을 따라 폭 2m 정도로 삭토하여 평탄하게 만들었다. 중앙부의 연대(烟臺)는 지름 3m, 높이 80㎝ 정도 잔존하고 있으며 봉수터 주변에 와편과 옹기편, 자기편 등이 산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관덕리 마산 봉수는 조선 시대 문헌 기록을 통해 직봉(直烽)의 노선이었음이 나타난다. 조선 시대 의성 지역을 통과하는 봉수 가운데 직봉(直烽)의 노선은 청로리 승원산 봉수→수정리 영니산 봉수→만천리 대야산 봉수→팔성리 고성산 봉수→상화리 계란산 봉수→관덕리 마산 봉수로 이어졌으며, 마산 봉수는 다시 북쪽의 안동시 일직면 감곡산 봉수로 보냈던 것이다. 여기서 관덕리 마산 봉수터 유적은 의성현 관내의 최종 봉수로서 안동 관할지로 봉수를 통한 통신 정보를 넘겨주는 매우 중요한 경계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조선 전후기의 지리지 기록에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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